오늘은 간만에 질의응답 시간입니다.
'PD님 안녕하세요? mbc PD님이 운영하는 블로그라고 해서 호기심에 와봤는데 쓰신 글들을 읽으며 정말 많은 걸 느끼고 배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남기는 이유는 고민이 있어서입니다. 인생에는 때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사실 남들보다 많이 늦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구구단도 한글도 또래보다 늦게 배웠고, 또래들보다 평균 신장도 작아서 늘 고민이었습니다. 대입시험에서 한 차례 낙방을 경험해 남들보다 대학도 늦게 들어갔고요. 그 때는 남들보다 늦어서 조급했지만 지나고보니 별 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는 굉장한 고민이었지만 지금 지나고보니 별 거 아니었고 살아가는데 엄청 큰 지장을 받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이 많은 제가 과거에 시도해 보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해서 포기했던, 그래서 지금 정말 후회가 되는 무언가를 도전해보려고 하는데 이게 괜찮은 선택일까요? 언뜻보면 바보 같은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때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 늦은 것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근데 살면서 이성적으로만 사는 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머리로는 절대 안된다고 하는데 자꾸 제 시선은 그 쪽으로 쏠리니까요. 지금 현재 이루어놓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많이 늦어버려서 그래서 확실한 가능성이 없는 것에 제가 도전을 하는 게 맞는 선택일까요? (가장 고민되는 부분은 그 도전의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게 부분적인 성공이지 나이 많은 제 인생의 전반적인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냥 개인의 만족을 위해 인생을 거는 것일 수도 있거든요.)
이런 글을 남겨 그저 죄송합니다. 저와는 달리 멋있게 사시는 PD님이 부러운 마음에 넋두리 해봤습니다. 고맙습니다.'
먼저 찾아와주셔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책을 읽어 배운 것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만든 공간입니다. 제게도 블로그에 올리지 못하는 말못할 고민이 많습니다. 책에서 보고 배운 것을 정리하는 사람이라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지, 실은 외로운 활자중독자랍니다.
질문을 받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네요. 인생에서 시간이란 어떤 개념일까요? 늦은 때라는 게 있을까요? 객관적으로 보아 늦은 나이라는 게 있긴 해요. 저 같은 경우, 대학 졸업하고, 영업사원 2년 일하고, 통역대학원 졸업하고 MBC 신입사원 공채로 나이 서른에 입사했습니다. 요즘은 서른에 입사가 늦지는 않지만, 96년 당시에는 분위기가 달랐어요. IMF 터지기 전이고, 대학 졸업하면 취업이 그나마 수월하던 시기라, 제 입사 동기들은 다 저보다 서너살 어렸어요.
함께 일하던 회사 선배들 중에는 저보다 나이가 어린 분도 있었어요. 군대는 아니니까, 평소에는 깍듯하게 존칭을 써주시죠. "민식씨, 이번 편집때는 말이에요." 그러다 술만 마시면 분위기가 바뀌어요. 취기가 오르면 욕부터 나와요. "너 이 새끼, 말이야. 입사를 하려면 제때 하라고. 왜 뒤늦게 들어와서 사람 불편하게 하는 거야?" 다음날 술이 깨면, 취중에 실수했다고 정색을 하고 사과를 합니다. 저는 그 다음부터 그 분이 있는 술자리에 안 갔어요. 즐겁지 않은 일에 왜 내 시간을 씁니까?
서른에 입사한 것도 늦었지만, 나이 마흔에 드라마국으로 이직하고도 힘들었어요. 드라마 피디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거든요. 예능 피디가 감히 드라마 연출한다고... 20대에 겪는 신고식을 나이 마흔에 치르려니 힘들더군요. 술자리에서 동료들이 저의 연출 스타일을 두고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상처를 좀 받았습니다. 이후에는 드라마국에서 외톨이로 살았습니다. 주량은 줄고 독서량이 늘더군요.
그냥 동시통역사로 살았거나, 예능 피디로 살았다면 겪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요. 그럼에도 저의 삶은 즐거웠습니다. 제가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 수 있었거든요. 제게 있어 시간은 빠르고 늦다는 개념이 없어요. 다만 '시간의 주인이 누구인가?'을 봅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나는 아직 공부를 더 해야할 것 같은데,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은데, 남들이 나이 서른에는 무조건 취업을 해야 한다고 해서 취업을 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분은 아마 직장에서 일하며 그렇게 느낄 거예요. '이건 내 삶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이질감이 들 때, 저는 퇴사를 결심합니다. '내가 모아놓은 기득권을 잃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5년 후, 10년 후에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만 고민합니다.
20대에 제 삶은 불행했어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적성에도 안 맞는 자원공학과(구 광산학과)에 진학하고 영업사원으로 일을 했지요. 그 시절에 깨달았어요.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구나. 아버지가 내 삶의 주인이로구나.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내 삶을 한번 살아봐야겠다. 그 결심을 하고 저는 외판사원으로 일하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도서관을 찾아갑니다. 도서관에 가면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려주는 책도 많아요. 저는 철학책이 다 그런 책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나이가 몇이고, 어떤 일을, 어느 정도로 갈망하는지 알 수 없고요. 고려해야 할 개인적 사정도 알 수 없지요. 자신의 문제에 가장 잘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선생님 자신입니다.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다 문득 답을 찾기도 하고요. 답을 찾지 못해도 적어도 책을 읽는 시간 동안에는 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쪼록 시간의 주인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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