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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책 추천이 시급합니다

by 김민식pd 2022. 3. 18.

귀신처럼 나의 취향을 알아 새로운 콘텐츠를 추천해주는 넷플릭스나 왓차를 이용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책 읽는 사람은 갈수록 줄겠네...' 봐야할 영화가 너무 많아 잠을 줄여야할 형편이죠. 넷플릭스는 내가 어떤 장르의 어떤 영화를 몇분 몇초까지 시청했는지 알기에 알고리즘 분석을 통해 나의 취향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가 않아요. 책을 읽는 건, 데이터로 분석해내기 어려운 아날로그적인 경험입니다. 내가 어떤 종이책을 한번 앉은 자리에서 어디까지 읽었는지 분석하는 알고리즘은 아직 없어요. (만약 생긴다면 무서울 듯... 누군가 나의 24시간을 지켜봤다는 뜻이니까?)

명퇴를 하고 나니 하루하루가 참 외롭고 쓸쓸하더군요. '아, 누가 재미난 책 좀 추천해주지 않을까? 읽을 책이 쌓여 있다면 은퇴 생활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데.'

항상 그렇듯 모든 고민에는, 그 고민에 답하는 책이 있습니다.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이수은 / 민음사)

책에서 저자는 <변신> <죄와 벌> <돈키호테> <고도를 기다리며>등을 추천합니다. 잠깐, <고도를 기다리며>라고? 20대에 대학로에서 연극으로 본 후, '도대체 고도가 누구야? 왜 기다리는 고도는 나오지도 않고 연극이 끝나는데? 내가 두 번 다시 연극을 보나 봐라.' 했던 그 작품입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책들이 나열되는데요. 목차가 눈길을 끕니다.

가슴속에 울분이 차오를 때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울분』 『일리아스』

사표 쓰기 전에 읽는 책
『달과 6펜스』 『변신』 『레미제라블』 

통장 잔고가 바닥이라면
『마담 보바리』 『죄와 벌』 

왜 나만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가
『태평천하』 『이름 없는 주드』 『다섯째 아이』 

자존감이 무너진 날에는
『설국』 『햄릿』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힘듭니다
『필경사 바틀비』 『돈키호테』 

작년 초, 이 책의 목차를 보고 두려워졌어요. '이 저자, 혹시 신기가 있나? 역술인인가? 지금 내가 사표를 막 썼고, 통장 잔고는 곧 바닥날 예정이고, 자존감이 무너져 사람들을 피해 칩거중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책을 색다른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내가 만일 한 나라의 왕자고, 엄청 똑똑하고 잘생겼는데, 왕국은 부유하고 국민들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는 예쁜 여자 친구도 있다면, 정말이지 남부러울 것 하나 없이 즐겁기만 하겠다. 자존감 같은 걸 고민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그게 단지 남들 눈에 비치는 모습일 뿐이라면? 아버지는 비명횡사했고, 원래 나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는데 엄마가 삼촌과 재혼하는 바람에 나이 서른에 아직도 왕자라면? 아버지가 정복했던 옆 나라의 왕자는 벌써 전쟁을 이끌며 자기 몫을 다 해내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방구석 여포일 뿐이라면?

햄릿은 타인의 요구(아버지; 내 복수를 해 다오), 도덕률 (옳고 정당한 방법으로 살인할 수 있는가), 자신의 욕망 (나도 이웃 나라 왕자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자아분열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가 위대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만일 햄릿이 극도의 가정불화와 망쳐진 연애와 무직자의 서러움 속에서도 '난 이대로 괜찮다.'고 했다면, 그는 희가극의 어릿광대가 됐을 것이다.

남이 괜찮다고 위로해서 괜찮아질 일이었다면 그런 위로가 없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자존감을 좀 키워 보라는 조언은 어쩌면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문제'라는 식의 참견일지 모른다. 햄릿의 고뇌 "사느냐 죽느냐"는 우리의 인생엔 자존감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는 절박한 걱정거리가 수두룩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69쪽)

오늘의 질문 :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햄릿은 왜 비극의 주인공이 된 걸까요?

남들이 보기에 객관적으로 좋은 환경이라고 절로 행복해지는 건 아닙니다. 주관적으로 내 삶이 힘들면, 힘든 거지요. 저자는 자존감이 내 방에서 혼자 키우고 지키는 조그만 선인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존감은 외부적 조건이나 타자와는 무관한, 홀로 온전하고 독립적인 심리 상태가 아니라 언제나 사회 속에서, 관계 속에서, 타자들과 나 사이에서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자존감을 해치지 않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이것이 인성 교육이고 도덕 교육이다. 내가 나를 깎아내리지 않으려면 남에게 부당하게 폄훼당하지 않아야 한다.'

(71쪽)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을 자기계발서 식으로 해석합니다. 햄릿은 자존감이 바닥을 친 왕자의 이야기고, 돈키호테는 미친 노인이 아니라 홀로 모험을 떠난 기사죠. 이런 신박한 해석이라니! 저자의 유쾌한 입담에 홀려 어느 순간 결제창에서 새 책을 주문하고 있군요.

이렇게 유쾌한 서평 에세이라면 자기계발서로 불러도 무방할듯 합니다. 자기계발서란 무엇일까요? 나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읽는 책입니다. 저는 자기계발서가 재미나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재미가 있어야 끝까지 읽고, 끝까지 읽어야 삶을 바꿀 힘도 날 테니까요.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저자가 소개한 책들을 찾아서 읽고 싶어질테니까요.  

은퇴를 선택한 제게 시급한 책이었어요. 수십년의 노후를 어떻게 보낼까? 그동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고전을 읽고 싶어요. 세상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싶은 지경이라니. 

기나긴 노후여 오라,
여기 활자중독자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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