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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누구와, 무엇을 하며 버틸 것인가

by 김민식pd 2019. 7. 12.

1주일 전, 방명록에 올라온 고민글입니다.

 

Q:

왜 굳이 이 블로그가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어딘가에 얘기하고 싶어서 피디님 블로그에 글 남겨보아요.

사는 게 너무너무 지겨워요.
그냥 아무 일 없이 눈물이 왈칵 날 것 같기도 하다가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기도 하다가.
아침이 오고 깨어나는 게 너무 괴로운 나날입니다.

이유는 회사 때문인 것 같아요.
밖에서 보면 좋은 회사인데 사실 알고 보면 여기저기 돈이 줄줄 새고, 그 돈을 메우기 위해 직원들을 옥죄고 있는 회사예요. 사장이 남의 돈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했고 그 때문에 매년 흑자를 내던 회사는 연간 수십억씩 적자를 내게 되었어요. 이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놀랐던 게 직원들이 잉여인력 없이 정말 모두 열심히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직원들의 애사심이 이 회사가 굴러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었는데, 회사가 지금 이 지경이 되다보니 일을 안하는 사람들은 넘쳐나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지치도록 일만 하다가 결국 퇴사하는 상황이에요. 
어느 부서의 누구와 이야기를 해도 퇴사하지 못해 꾸역꾸역 다니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느 날은, 이렇게 매일 아침 꾸역꾸역 출근하고 있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요. 일을 하면서 매일매일이 즐겁진 않더라도 보람되고 즐거운 순간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매일매일 버틴다는 마음으로 다니고 있는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더라구요.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팀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몇몇 직원들이 새로 들어오면서 일하는 분위기에서 시시덕거리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그 사람들 중 몇몇이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말들을 농담이랍시고 해왔습니다.
몇 개월 동안, 분위기 이상해질까봐 그냥 견디다가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어느 날 그런 건 농담이 아니니까 저에게 안하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보였더니 그 자리에서는 미안하다,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하더니 그 다음날부터 저를 소위 무시하기 시작하더라구요. 

회사는 회사대로 힘든데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신경을 계속 거슬리게 하니 정말 회사를 다닐 이유가 하나도 없는 요즘이에요.  답답한 마음에 피디님 블로그에 들어왔는데 처음 클릭한 글이 '한자와 나오키' 이야기니  정말 버티는 게 맞는 건지, 이렇게 정신이 피폐한 상황이면 그만두는 게 맞는 건지, 어려운 요즘입니다. 피디님은 어떤 마음으로 힘든 시기에 버티셨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답을 구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대나무숲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ㅠ_ㅠ

다음번에 강연으로 또 뵙겠습니다.

 

A: 글을 쓰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함부로 고민상담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한 사람의 고민의 깊이를 타인이 감히 재단할 수 없고 또 제가 그만한 그릇이 아니라고요. 답을 할 능력은 없지만 글을 읽고, 너무 힘든 처지라 뭐라도 말씀을 드리고 싶어 글을 써봅니다. 이렇게 힘들 때 어떻게 할까요.  

첫째, 회사일과 별개로 즐거운 취미를 찾아봅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잘 하는 일일 수도 있고, 앞으로 잘 하고 싶은 일일 수도 있어요. 잘 하는 일을 할 때는 자부심을 느끼고요, 잘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성장의 보람을 느낍니다. 저의 경우, 첫 직장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저녁에 영어 학원을 다녔어요. 학원을 다니면 학원비를 지원해주더라고요. 회사가 주는 괴로움이 크니까, 금전적 보상이라도 더 타내야 괴로움이 상쇄될 것 같았어요. 영어로 잘난 척하니, 우울감은 잊을 수 있었어요. 영어는 이미 잘 하는 것이었고요. 못하지만 잘 하고 싶은 건 수영이었어요. 밤에는 영어 학원, 아침에는 수영 강습을 다녔어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는데, 조금씩 늘어가는 게 재밌더군요. 괴로울 땐, 조금이라도 즐거운 일을 찾아봅니다. 독서, 여행, 외국어 공부, 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취미입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할 때, 즐거우신가요?

둘째,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책을 읽고,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그의 강연을 쫓아다니고, 그가 나온 팟캐스트를 찾아서 듣습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씁니다. 또는 나를 좋아하고 나랑 잘 맞는 사람과 만나 재미난 취미를 같이 즐겨요. 저는 괴로울 때, 친구들과 모여서, 혹은 딸들이랑 여행을 다니면서 보드 게임을 즐겼어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내어줍니다. 회사에서 맺은 관계로만 하루를 채우지 않습니다.

셋째, 조금 더 긴 시간의 관점에서 현재의 나, 현재의 회사를 바라봅니다. 지금 함께 하는 이들이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 사라지는 것도 금방일 거예요. 입사하고 10년이 넘은 사람이라면, 앞으로도 10년 이상 버틸 공산이 커고요. 지금 회사의 위기가 10년째 지속되고 있다면, 앞으로도 10년 이상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생긴지 얼마 안 된 문제라면, 사라지는 것도 금방일지 몰라요. (수요일에 올린 글에서 '피라미드와 베를린 장벽의 비유'를 봐주세요.) MBC가 저를 힘들게 한 시절, 회사에서 버틴 이유는, 입사하고 행복하게 산 시간이 15년이고, 노조 부위원장이 된 후 삶이 괴로워진 건 겨우 7년입니다. 만약 비정상의 시기가 15년이 된다면, 그때는 저도 아마 퇴사를 고민했을 거예요. 그건 비정상이 정상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버틸 것인가, 싸울 것인가... 어려운 질문이지요. 얼마 전 소개한 장강명 작가의 <산 자들>을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립니다. 우리 시대, 일이란 무엇인가, 좋은 고민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저는 힘든 시절, 재미난 책을 읽으면서 버텼어요. 책에서 얻은 가르침과 즐거움 덕분에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고요. 님도 모쪼록 힘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와 무엇을 하며 버틸 것인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맛난 것 먹고 재미난 일을 하면서 버팁니다.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버팁니다.

얼마 전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쓴 엄기호 저자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우울감이 있을 때, 걷기를 추천하셨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나가서 풍경을 보며 걸으라고 하셨어요. 요즘같이 더운 계절에 저는 이른 아침 산책을 좋아합니다. 주말이면 오전 여섯 시에 나가 혼자 양재천을 걷습니다. 

마음이 괴로울 땐, 걷는 것도 좋은 명상법입니다. 

모쪼록 마음이 편안해지시기를 소망합니다.

부족하고 어쭙잖은 답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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