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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공짜 연애 스쿨

페미니즘 공부를 권한다

by 김민식pd 2019. 3. 20.

(한겨레 신문의 외부 필진으로,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어깨가 무겁습니다. 첫번째 주제로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다, 내가 지금 스무 살이라면,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생각했습니다. 스무살 김민식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매일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여러분 덕에 글쓰기가 즐거워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페미니즘 공부를 권한다


가난한 외모 탓에 20대에 연애에서 숱한 좌절을 겪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소개팅 미팅 과팅 도합 스무 번 연속 차인 것은 충격이었다. 연애가 너무 하고 싶었다. 책을 찾아 읽으며 대화를 잘 하는 법에 대해 공부했다. 가장 좋은 화법은 ‘입을 다물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었다. 연애에서는 말을 잘 하는 것 보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훨씬 유용했다.

95년에 외대 통역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입학 동기 40명 중 남자는 6명뿐이었다. 언어감각도 뛰어나고, 기억력도 좋은 여학생들이 성적 상위권을 차지했다. 90년대 후반에 이미 ‘여성 상위 시대’의 도래를 온 몸으로 느끼고, 페미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보다 똑똑한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경쟁하는 것보다 협업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보다 똑똑한 후배와 결혼했고, 지금 아내의 연봉은 나보다 훨씬 더 높다. 나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아내와 경쟁하지 않는다. 나보다 잘 버는 사람을 배우자로 얻었으니, 진짜 승자는 나다. 

2019년을 살아가는 20대 남성이라면 페미니즘을 공부할 것 같다. 비혼을 선택하는 여성이 늘어난다는 건 앞으로 갈수록 장가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성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들의 입장을 전향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짝짓기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저/ 황금진 역/ 정희진 해제)을 권한다.

호주에서 결혼한 남자들은 미혼인 남자보다 평균적으로 약 15% 더 많이 번단다. 저자는 이를 ‘결혼 프리미엄’이라고 하는데, 아이가 생기면 이 프리미엄은 더 커진다. 25세 호주 남성이 40년간 직장생활을 한다면, 아이가 없는 경우 200만 달러를 번다. 하지만 아이가 있다면 250만 달러를 번다. 여성의 경우, 아이가 없는 여성은 역시 아이가 없는 남성과 비슷한 수준으로 190만 달러를 번다. 하지만 아이가 있으면 소득은 130만 달러로 떨어진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것이 여성 소득 증진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호주 남자는 세계에서 가사 노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걸로 유명한데도 그렇다. 한국은 어떨까? 정희진은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 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출산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기혼 부부의 출산율은 1.9명으로 두 명을 육박한다.) 대한민국에는 결혼한 여성을 위한 인프라와 사회적 존중 문화가 전무하다.’


(<아내 가뭄> 책머리에서)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20년이 흘렀다. 학교에서 본 똑똑한 여자 동기들이, 지금은 전업 주부가 되어 있거나 간간이 시간제로 일한다. 남자 동기들은 대기업의 상무가 되거나 금융회사의 임원이 되었다. 남자 동기들은 아내를 얻은 덕에 일에 전력을 다하고 능력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똑똑한 여자 동기들에게는 아내가 없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면서 그들은 자아실현의 기회를 잃었다. 모든 사회적 불평등은 가사 노동에서 출발한다.

요즘 나는 늦둥이 딸 키우는 재미에 폭 빠져 산다. 한겨레신문에 1년 전까지 ‘김민식 PD의 육아일기’도 연재했다. 퇴직 후, 꿈은 딸들 곁에서 살며 손주를 돌봐주는 것인데, 가끔은 고민이 된다. 요즘처럼 결혼, 출산, 육아가 힘든 시절에 딸에게 엄마 되기를 권할 수 있을까? 

기회가 될 때마다 남자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되자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페미니즘의 시작은 가사 노동의 분담이다. 집에서 실천하는 민주주의 운동이다. 페미니스트가 늘어나고, 가사 일의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 때, 내 꿈도 이뤄질 것이다. 페미니즘을 알리는 것이 내가 딸들의 결혼 확률을 높이는 길이고, 손주를 얻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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