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 PD 스쿨/매일 아침 써봤니?

오늘도 나는 편지를 씁니다

by 김민식pd 2019. 3. 13.

매일 아침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처음 쓴 편지는 당신의 글에 대한 답장이었어요. 2000년 저는 MBC 청춘 시트콤 <뉴 논스톱>PD로 일했어요. 2년 반 동안 일일시트콤을 만드느라 힘들었어요. 당시의 낙은, MBC 시청자 게시판에 들어가 여러분이 올린 글을 읽는 일이었어요. 그중에는 극중 박경림을 짝사랑하는 조인성을 향한 연애편지도 있고, 양동근을 몰래 좋아하는 장나라를 응원하는 위문편지도 있었어요. 밤을 새며 일하던 제게 여러분이 써주신 편지는 큰 힘이 되었어요. 답장을 써야겠다는 마음에 MBC 프로그램 게시판에 김민식 PD의 연출일기라는 글을 연재했어요.

논스톱시리즈가 끝나고, 밤잠을 아껴가며 쓴 편지를 올려둔 공간도 MBC 홈페이지 개편과 함께 사라졌어요. 10년 가까이 청춘 시트콤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방송사 편성표에서 저녁 7시 청춘 시트콤이 사라졌어요. 심지어 노조 집행부로 일한 다음부터 한동안 프로그램 연출에서 배제되었어요. 고민이 깊어졌지요.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김민식이다.’ ‘김민식은 야구 선수도 있고, 축구 선수도 있는데, 김민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나인가?’ ‘아니다. 나는 시트콤 PD 김민식이다.’ ‘시트콤이 사라졌는데도 아직 시트콤 PD 김민식인가?’ ‘아니다. 나는 드라마 PD 김민식이다.’ ‘회사에서 드라마 연출을 맡기지 않아도 드라마 PD인가?’ 할 말이 없더군요.

나는 누구인가?’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어요. 그 답을 찾기 위해 2011<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라는 블로그를 열었어요. 매일 아침 당신에게 편지를 썼어요. 블로그 초기엔 <공짜 피디 스쿨>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어요. 전국의 언론인 지망생들에게 전하는 편지였어요. 좋은 언론인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책을 많이 읽는 게 좋다는 생각에 추천 도서 목록을 올리기도 했어요. 더 좋은 피디가 되기 위해 내가 하는 매일의 노력은 무엇일까? 고민 끝에 <짠돌이 독서 일기>를 연재했어요. 매일 읽는 책에서 좋은 글귀를 찾아 피디 지망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어요. 피디 지망생을 위해 쓰던 편지는 몇 년 안 가 그만뒀어요. 나 자신 더 이상 PD로 일하지 못하는데 감히 무슨 충고를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글쓰기를 그만둔 건 아니에요. 힘들 땐 나 자신을 위로하는 글을 썼거든요. 때로는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그렇게 못난 사람이 아니라는 항변도 했어요.

유배지로 좌천된 후, 블로그의 내용은 오히려 풍성해졌어요. 남는 시간에 서울 근교로 자전거 여행을 다녔고요. 멋진 풍광을 사진으로 담아 블로그에 올렸어요.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도 했어요. 많은 분들이 영어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걸 보고, 영어를 돈 안 들이고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그 고민의 결과를 매일 띄우는 편지에 담았고요. 하루는 어느 출판사 편집장님이 블로그에 답장을 올리셨어요. 국내 독학파의 영어 공부 비결을 책으로 내자고요.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입니다. 매일 아침, 이름 모를 독자에게 띄운 편지가 14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의 원고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이듬해에는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쓰는 즐거움에 대해 책을 냈어요. 그렇게 나온 책, <매일 아침 써봤니?>6쇄를 찍었습니다. 이제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가 없어도?’ ‘읽는 이가 없어도 나는 매일 글을 쓸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다.’ ‘작가로 살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매일 책을 읽는다. 매년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매일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이 더 좋은 글을 쓸 것이라 믿고 노력할 것이다.’

오늘도 저는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제 편지를 받아주고 읽어주는 당신이 있어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생각>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고를 청탁하신 잡지사 편집자님이 예전에 논스톱 애시청자로서 카페 활동을 하신 분이었어요.

제게 보내신 편지를 보며, 감회가 새로웠어요.

20년 전 이름 모를 독자에게 띄운 편지가, 원고 청탁 메일이 되어 돌아왔네요.

역시, 삶은 하루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