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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명문대라는 학벌이 앞으로도 통할까?

by 김민식pd 2018. 12. 26.

1996년도에 MBC 입사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느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너도 관악이지?”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았더니, “아, 학교 말이야.” 하시더군요. ‘출신 고등학교를 물으시는 건가?’ 나는 관악고가 아니라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더니 피식 웃더니 가셨어요. 나중에 의미를 알아차렸지요. ‘너도 서울대 나왔지?’는 얘기를 둘러서 물어봤다는 걸. 예전에는 피디들 중 서울대 나온 선배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좀 줄었어요. 서울대라는 학벌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고 어렴풋이 느끼던 중인데, 이범 선생님의 <나의 직업, 우리의 미래> (이범 / 창비)라는 책을 보니 이 문제를 제대로 짚어주시는군요. 


한국이 학벌 사회가 된 이유는 정부 주도 경제에 있었답니다. 대학 서열화와 고시 제도가 결합한 결과, 고위 관료나 공무원은 SKY 출신들이 장악했어요. 8,9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 발달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기업이 정부의 눈치를 많이 봤어요. 한국의 재벌들은 군부 독재 시절, 정경유착의 결과로 성장합니다. 공기업이었던 한국이동통신이나 유공을 불하받아 성장한 기업도 있고요, 정부에서 차관을 받아 종자돈을 대준 기업도 있어요. 정부의 경제 주도 정책을 따라가자니, 인맥에 신경을 쓰게 되고요. 그 결과 기업에서도 정부 고위 관료들이 나온 대학 출신을 많이 채용합니다. 그 과정에서 학벌을 통한 유착 관계가 심해지지요. 이게 과거에 SKY 출신들이 관료와 기업을 장악하게 된 이유입니다.

요즘은 SKY가 예전만큼 힘을 못 씁니다. 이범 선생은 탈학벌의 원인 세 가지를 드는데요. 

1. 정부는 더 이상 ‘갑’이 아니다. 

경제는 이미 기업이 주도하는 판으로 바뀌었어요. 예전처럼 정부 주도 성장은 사라졌어요. 2014년 삼성 그룹 사장 승진자 명단을 살펴보면, 8명 중 SKY 출신은 단 1명입니다. 서울대, 성균관대, 중앙대, 한국외대, 숭실대, 성균관대, 서강대, 그리고 이건희 회장의 둘째 딸이 나온 미국 대학. 우리나라 1000대 상장사의 CEO 중에 ‘스카이’ 대학을 나온 사람의 비율이 2007년 59.7%이던 것이 불과 6년 만에 뚝 떨어져서 2013년에는 39.5%가 됩니다. 3분의 1이 감소합니다. 

이렇게 된 계기는 1997년의 외환 위기랍니다. IMF 사태로 기업들이 위기를 겪으며 정부의 영향력이 줄어듭니다. 학벌보다 실적이 더 중요해집니다. 인맥 위주의 인사에서, 능력 중심의 인사로 바뀐 거지요. 10대에 공부를 잘 한 시험형 인간의 특징은, 인정 욕구와 성취욕이 강하고 지능도 높고 약간의 강박적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에 강한 사람들이 반드시 대인 친화력이 좋다거나 위기 대응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출신 학교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시장 대응력이나 조직 적응력이 뛰어나지요. 그 결과 기업이 학벌주의에서 벗어납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살아남는 조직이 되었어요.


2. 정기 채용에서 수시 채용으로.

공채는 일본의 채용 방식을 도입한 것입니다. 서구의 기업들은 정기 채용 대신 수시 채용을 합니다. 수시 채용에서는, 학벌보다 전문성을 보고요. 개인의 전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는 대학 성적보다 업무 능력, 즉 경력입니다. 수시 채용의 경우, 교육 훈련비용이 절약됩니다. 뽑아서 바로 쓸 수 있으니까요. 요즘 뜨는 IT 업계 쪽, 판교 같은 곳에 가 보면 고졸도 많아요. 일만 잘하면 되지, 굳이 출신 대학을 따질 이유가 없는 거죠. (<유튜브의 신> 대도서관의 약력을 봐도 알 수 있지요.) 수시 채용을 하면서, 학벌 대신 경력을 중시합니다.

 

3. 도련님, 공주님의 출현.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기피하는 신입사원의 유형이 있대요. 바로 도련님과 공주님입니다. ‘스펙’ 좋고 허우대 멀쩡해서 뽑았는데, 뽑고 나서 보니 도련님, 공주님이더란 거죠. 수동적이고 자기만 알아서, 팀워크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말해요. 사원 발령이 나면 부모가 전화한대요. “우리 애를 왜 거기로 보냈나요?”하고. ‘스펙’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놓고 보니, 독립성이나 자율적 판단 능력은 오히려 떨어지더랍니다. 부모나 선배, 혹은 교수가 조언하는 대로 했을 때 좋은 ‘스펙’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런데 사회생활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이 중요하거든요. 스펙과 관련없이 혼자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고 또 열중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서는 필요하지요. 또, 도련님과 공주님들은 이직률이 높습니다.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학업과 성장을 해왔기에 직장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 환경을 못 견디는 거죠. 


학벌과 스펙의 중요성이 낮아진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경제 구조의 변화, 즉 정부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학연과 같은 ‘연고’의 중요성이 낮아진 것. 둘째는 고용 형태의 변화, 즉 정기 채용해서 교육 훈련 후 배치하는 모델에서 수시 채용해서 즉시 배치하는 모델로의 변화. 셋째는 기존 채용 방식의 결점으로 간주되는 기술적인 문제들, 즉 도련님 공주님의 증가라든가 이직률이 높다는 점 등. (중략)

여기서 “요새는 서울대 다니는 학생들도 취업 걱정 한다면서?”라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대생도 취업 걱정을 한다는 것이 취업난의 심각함을 보여 주는 증거로 종종 언급되는데, 이건 너무 거친 논리입니다. (중략) 취업난의 증거라기보다는 노동 시장의 성격이 변화한 탓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즉 한편에서는 명문대라는 간판의 가치와 후광 효과가 하락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문성’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내재적 가치를 요구받게 되는 것, 이것이 서울대생이 취업 걱정을 하게 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요.

(위의 책 123쪽)


얼마 전 수능이 끝났습니다. 1987년 이맘때가 생각나네요. 대학 1지망 떨어지고, 전혀 원치 않던 전공을 하게 되어 괴로워하던 나날. 그 시절의 이야기를 수능이 끝난 고3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요. 진로특강을 할 때 늘 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른들은 그동안 여러분에게 나이 스물에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느냐로 남은 인생이 결정난다고 말해왔어요. 그건 여러분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한 말입니다. 스무 살에 인생이 결정난다면, 스무 살 이후의 삶은 의미가 없을까요? 20대에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외국어를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저는 서른 살에 예능 피디가 되었고, 마흔 살에 드라마 피디가 되었고, 쉰 살에 작가가 되었지만, 그 어떤 직업도 저의 대학 전공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려서는 남의 말 잘 들은 사람이 유리했지요. 부모님 말씀 따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이 우수한 학생이라면, 사회에 나가면 달라집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그걸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좋은 일꾼이 됩니다. 인생은 스무살에 결정지어지는 게 아닙니다. 진짜 인생은 스무살에 시작됩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공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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