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스릴러 소설을 읽다가 문득

by 김민식pd 2018. 12. 18.
터키 여행 중 전자책으로 읽은 소설입니다. 
<나는 너를 본다> (클레어 맥킨토시 / 공민희 / 나무의 철학) 

쌍둥이 자매가 있어요. 동생이 어느날 성폭력을 당합니다. 괴로워하는 동생을 본 언니는 경찰이 됩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어느날 동생을 성폭행한 사람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는데 절망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범인을 처벌할 수가 없어요. 동생이 경찰에 진술하면서 자신은 나중에 범인이 잡혀도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테니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거죠. 피해자인 동생의 협조 없이 범인을 처벌하기가 힘든데 말이죠. 
언니가 동생에게 따져요. 왜 그랬냐고. 동생이 그러죠. 몇 년이 지나 자신이 그 사건으로부터 회복되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로부터 범인이 잡혔다고 연락이 오는 게 두려웠대요. 성폭행의 피해자로서의 기억은 잊고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은데, 뒤늦게 법정에 나가 고통스런 기억을 다시 되새기기 싫었다고. 언니는 동생에게 분노합니다. "너의 그런 결정으로 인해 범인이 자유의 몸이 되어, 그런 짓을 해도 되는 줄 알고 돌아다니며 똑같은 짓을 다른 사람에게 하도록 놔두겠다는 거야?"

경찰이 된 언니는 동생을 이해할 수 없어요. 모든 피해자가 동생 같다면 그녀와 동료 경찰들이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피해자가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데 어떻게 싸울 수 있겠어요. 

소설을 읽다 문득 1년 전 생각이 났어요. 2017년 봄, 저를 드라마국에서 쫓아낸 사람이 문화방송의 사장이 되었어요. 그 장면을 보고 괴로웠어요. 주조정실 교대 근무에 근근이 적응하고 있었어요. 유배지에 발령난 덕에 1년에 책을 250권을 읽었고요.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도 주조 근무하는 덕에 쓸 수 있었어요. 드라마가 아니라도 세상에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어쩌면 당시 사장님은 오래도록 작가를 꿈꾸던 제게 꿈을 이뤄주신 은인인지도 몰라요. 저는 딴따라에요.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제대로된 뉴스나 다큐를 만들겠다고 MBC에 입사한 것도 아니잖아요. 사람들 웃겨보려고 코미디 피디가 된 건데,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게 제게는 최선입니다. 정권도 바뀌었으니 사장도 이전처럼 방송을 막무가내로 망가뜨리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니 그냥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은둔한 선비처럼 지내고 싶었죠. 그러다 문득 생각했어요.
조용히 사는 게 과연 모두를 위한 최선일까? 방송을 망가뜨리고, 기자와 피디들을 쫓아내고도 멀쩡히 사장이 되고, 또 그 임기를 온전히 채우도록 두는 게 옳은 일일까? 먼훗날 나는, 그 시절을 조용히 숨어서 즐겁게 살았으니 행복했노라, 하고 돌아볼 수 있을까? 그렇게 산 나 자신을, 나는 용서할 수 있을까?

소설 속 피해자의 마음도 이해는 갑니다. 그래요. 싸우는 건 힘들어요. 싸우는 과정에서 더 다칠 수도 있고요.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지요. 차라리 시간이 지나 잊혀지도록 하는 게 최선일 수도 있어요. 공개석상에 나온 미투 피해자는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는 게 가장 힘들 겁니다. "그냥 참고 살지 그랬어?" 라고 조언하는 이도 있거든요. "이제부터라도 좀 살살해봐. 더 이상 키우지말고." 라고 하는 이도 있고요. 저도 정말 많이 들은 이야기에요.

왜 그래야 하나요? 그래도 되는 줄 알라고? 그런 짓을 하고도 사람들의 비난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간다는 걸 보여주라고? 우리 시대에, 피해자가 되고 안 되고는 그냥 운이에요. 운이 나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됩니다. 운이 좋아 피해자가 되는 일을 피했다면, 우리가 해야할 최소한은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낼 때, 외면하지 않는 일이겠지요. 용기를 낸 사람을 오히려 비난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다들 즐겁살았으면 좋겠어요. 피해자도 과거의 고통을 치유받으면서요. 다만, 가해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모두 더 좋은 세상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너를 본다>
쫄깃쫄깃 참 재미난 스릴러입니다. 이렇게 재미난 소설을 읽으며 별 생각을 다 했군요. 7년의 세월이 제게 남긴 상처가 은근히 큰가 봐요. 그 상처를 어떻게 보살피며 살 것인가.... 어쩌면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나름의 치유 과정일지도 몰라요. 부끄러운 글에 공감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여러분이 귀한 인연입니다. 늘, 고맙습니다.

누군가 싸울 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함께 해주시는 여러분이, 
진정 이 시대의 챔피온입니다. (feat. 싸이)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문대라는 학벌이 앞으로도 통할까?  (15) 2018.12.26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  (3) 2018.12.21
이토록 멋진 성장담!  (8) 2018.12.14
작가님들의 영업  (6) 2018.12.13
우리 함께 춤추실까요?  (6) 2018.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