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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간판에 맞서는 방법

by 김민식pd 2019. 3. 11.

고등학교 진로 특강을 가면 방송사 PD로 입사하려면 반드시 명문대를 나와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김태호, 나영석, 등등 언뜻 떠오르는 스타 피디들은 다 SKY출신입니다. 중고교 시절 공부만 한 사람보다는, 아이돌 그룹 사생팬으로 산다거나, 드라마를 정주행하며 TV를 열심히 즐긴 사람이 콘텐츠를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피디 공채 심사를 한 적이 있어요. 블라인드 전형이라 출신학교를 전혀 보지 않고 뽑았는데요. 뽑고 나서 보니 다 좋은 대학을 나온 친구들이더라고요. 이상했어요. 학벌을 보고 뽑은 게 아닌데 왜 그럴까? 제가 뽑은 기준은 하나입니다. 성실함이에요. 어차피 뽑으면 저랑 같이 조연출로 일할 친구들이니까, 열심히 일할 것 같은 사람을 뽑았어요. 1박 2일 동안 합숙 평가를 하며 가장 성실해 보이는 사람들을 뽑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런 친구들은, 고교 시절에도 성실하게 공부를 열심히 했더군요. 밤샘 촬영 잘 하는 친구들은, 결국 어려서 밤새워 공부해본 사람이더라고요. 

한국사회에서 명문대라는 학벌이 통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게 간판이기 때문입니다. 장강명 작가님의 <당선, 합격, 계급>에서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간판은 왜 중요할까? 어느 때 간판이 가장 중요한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우리는 간판을 큰 기준으로 삼는 수밖에 없다. (중략)

아무 경력 없이 노동시장에 자신을 팔아야 하는 구직자들은 기업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는데, 이 역시 본질은 '좋은 간판을 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걸 '스펙'이라는 단어로 부르기도 한다. 학점, 자격증, 인턴 경험, 아르바이트 경력, 봉사 활동......

그중 한국 기업들이 매우 중시한다고 알려진 간판이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다. (중략)

어느 대학 간판을 갖고 있느냐로 계급사회를 만든다. 패거리를 이룬다. 자신보다 나은 간판을 가진 사람 앞에서 위축되고, 못한 간판 앞에서 우월감을 맛본다. 여기서도 엘리트 의식과 피해 의식, 권위주의와 반권위주의가 동시에 무럭무럭 자란다.

노동시장이라도 지원자의 실력을 비교적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몇몇 예외적인 부문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포츠나 엔터테인먼트 같은 분야가 그렇다. 프로 구단 스카우터들은 대학 선수들의 경기력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만 학교 이름은 따지지 않는다. 연예기획사 역시 그렇다. 

(<당선, 합격, 계급> 309~313쪽)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 중에 '아니, 일을 저렇게 못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좋은 회사에 들어갔지?' 싶은 사람이 있어요. 알고보니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더군요. 나이 스물에 대학 입시에서 거둔 성공이 그 사람 인생에서 최고의 업적인 거죠. 앞으로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 처음엔 좀 힘든 일도 해야하고, 위에서 시키는 일도 해야하고, 때로는 갑질을 견뎌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명문대 나온 사람은 그럴 때마다 '내가 ** 대 출신인데 겨우 이런 일을 해야해?'하면서 불만을 터뜨립니다. 반대로 학벌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궂은 일도,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간판과 실제 실력간의 격차가 벌어집니다. 

종신고용의 시대에는 간판이 중요했지요. 첫 직장이 평생 직장이니까요.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여러 직장을 옮겨다니며 다양한 경력을 쌓으며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대학 학벌로, 즉 10대의 공부 실력으로 인생의 승부가 끝나지 않아요. 100세 시대에는 20대의 공부, 30대의 경력이 중요합니다. 

'간판의 위력을 떨어뜨리자'는 장강명 작가의 결론에 저도 공감합니다. 왜 내가 뽑은 신입사원은 다 명문대를 나왔을까? 나중에 깨달았어요. 명문대만 뽑는 줄 알고 명문대생들만 지원한 거죠. 1년에 방송 3사에서 신입 PD를 다 뽑아도 10명 남짓인 거죠. 명문대 인문계열 졸업생만 해도 수천명인데 말이죠. 공중파의 벽이 높아서 미리 포기한 친구도 많을 겁니다. 요즘 저는 진로 특강 가면 방송사 공채 보다는 유튜브를 권합니다. 즐기면서 유튜브를 하는 게 머리 싸매고 시험 공부 하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합니다.

명문대를 나와 방송사 피디로 입사하는 시대는 가고, 고졸 학력을 가진 대도서관이 유튜브 스타가 되는 시대가 왔어요. 공중파의 독과점은 무너지고, 유튜브의 시대가 왔어요. 이제 간판은 중요하지 않아요. 실력이 중요합니다. 간판에 주눅들지 말고, 실력으로 한 판 붙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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