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장르를 안 가리고 다 봅니다. 헐리웃 블록버스터, 유럽의 예술 영화, 다 봅니다. 일본의 공포 영화나 태국의 액션물도 봐요. 가리지 않고 다 보니, 중요한 건 선택이지요.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라, 예전엔 영화 잡지를 꼬박꼬박 챙겨봤어요. 영화평론가들의 별점을 보고 영화를 골랐거든요. 요즘은 영화를 보기 전에 예매 순위를 먼저 봅니다. 전문가들이 골라주는 영화보다, 대중의 취향이 저랑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법관들이 내놓는 판결이 시민들의 법정서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신문에 실린 기사보다 독자들이 달아놓은 댓글이 더 명쾌할 때가 있어요. 사법고시며 언론고시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는 이들의 수준은 왜 점점 내려갈까요? 개인이 아니라 조직의 일부가 되고 권력의 일부가 되는 순간, 그들의 감각은 부패하기 시작하는 걸까요? 나만 불편한가요?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 라는 질문을 던지는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 민음사)에 보면 작가는 '조선 시대 과거 제도의 3가지 폐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사회적 낭비가 심했다.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의 나이는 평균 36.4세였다. 10대 중반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쳐서, 합격하는 데 20년이 걸린 셈이다. 60대, 70대까지 시험을 준비하는 장수생도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시험을 치기도 했다. 

문과 시험을 치는 사람이 정조 때에 이르면 10만 명이 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응시자가 20만 명을 넘었다. 최종 합격자는 한 해 서른 명 남짓이었다. 청년 수십 만 명이 한창 일할 나이에 수십 년 동안 공부에만 매달렸다. 실생활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유교 경전 공부였다. 그걸 외국어 원전으로 공부해서 외국어로 답안을 쓰는 훈련만 주야장천 받았다.

둘째, 정작 필요한 인재는 뽑지 못했다. 최종 합격자들이 과연 관료로서 유능한 인재들이었을까? 좋은 성적을 받아 높은 자리에 임명되는 사람일수록 암기력과 논리력, 그리고 중국어 독해와 작문 실력이 뛰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과학기술이나 경제, 민생은커녕, 그 시대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행정에 대해서도, 군사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사회생활을 오래 했다거나 처세에 능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현실을 몰랐고, 현실을 제대로 살피는 능력도 키우지 못한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사라진 명나라를 섬기기 위해 초강대국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는 따위 헛소리를 진지하게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중략)

셋째, 과거제도는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다. 이 제도는 블랙홀처럼 온 나라의 젊음과 재능을 빨아들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시험만 잘 치면 순식간에 기득권 핵심부에 들어설 수 있다는 약속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유능한 청년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중소 규모의 지적, 산업적 프로젝트에서 관심을 거두고 중앙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합격자들은 그 질서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가 되었다. 고작 생원이나 진사 정도의 자격증을 얻은 이조차 그랬다. 나중에 사람들은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원과 진사가 되기 위해, 봉건 질서에서 자기 신분을 겨우 한두 칸 더 끌어올리기 위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노력했다. 입신양명, 출세라는 가치가 삶의 목표가 되었다. 

(<당선, 합격, 계급> 99쪽)


어쩌다 기자가 기레기라고 욕을 먹고, 검찰이 검새라 불리게 되었을까요? 대학 시절, 법과 정의를 논하고,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위해 언론이나 법조계에 투신하겠노라 결심한 이들이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순간, 가장 보수적인 체제의 수호자가 됩니다. 법관이 법을 농락하고, 기자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광경은 그래서 생기죠. 

저는 언론사 입사 시험을 언론고시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게 부르는 순간, 그 구성원들은 자신이 새로운 권력을 얻은 사람이라 생각하거든요. 권력은 부패하기 쉽습니다. 아래를 보기보다 위를 보고, 경영진의 눈치를 보고, 경영진은 권력의 눈치를 보죠.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자기 검열이 없다면 부패를 막기는 쉽지 않아요.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권력을 향해 촛불의 대중들은 분노했어요. 촛불 집회 현장에서 터져나오는 언론에 대한 야유와 분노는 반성하지 않는 집단을 향한 반성의 촉구입니다.

기자 지망생들을 상대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기를 쓰고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 할 게 아니라, 바깥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고. 기자가 아니라도 블로그로 글을 쓸 수 있고, 피디가 아니라도 유튜브로 영상을 만들 수 있으니, 일단 콘텐츠를 만드는 연습을 해보라고요. 

조직을 바꾸겠노라 다짐하고 들어간 이들이 조직과 함께 부패하는 걸 보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직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좌절하지 말고, 바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기존 시스템이 적폐로 불리는 시절입니다. 공채에 대한 환상은 깼으면 좋겠어요. 장강명 작가가 지적한 것처럼 사회적 낭비가 심하고요, 필요한 인재를 뽑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무엇보다 사회의 창의성을 가로막거든요.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저물고 있어요. 이제는 소셜 미디어의 시대입니다. 거대한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보다, 콘텐츠를 지닌 개인의 힘이 더 강해지는 시대가 옵니다. 나만의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 고민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장강명 작가의 <당선, 합격, 계급>,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2018/11/30 - [공짜 PD 스쿨] - 좌절의 시스템, 공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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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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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리보리 2018.12.05 0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성적만이 아니고 스펙을 보니 좀 유능한 사람을 뽑나 했는데, 토익만점자의 영어 듣고 말하기 어렵다는 고백 들으니 더 고달파졌더라구요. 진짜 역량을 키워야겠어요. 읽고 글쓰고 외국어 하고요

  2. 섭섭이짱 2018.12.05 0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맞아요. 요즘은 소셜미디어 시대라
    언론사 기사도 많이보지만 SNS 에서 올라온
    개인이 만든 콘텐츠를 더 많이 보고 듣는거 같아요.

    소셜미디어 덕분에 피디님을 알게 되다보니
    소셜미디어가 왜 중요한지 잘 알거같아요. ^^

    오늘도 좋은 생각거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3. 꿈트리숲 2018.12.05 08: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들림 안에 있으면 그 흔들림을 모르는 거라는
    책 속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이 전부라 여기며
    살기에 계급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나봐요.

    고시 준비생들에게는 세상이 온통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로만 가득차있고,
    권력속에 있으면 세상이 온통 자신을 지지한다
    여기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인재를 뽑는 그들이 좌절의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한다면 우리가 달라지는 수밖에 없겠어요.
    눈치보는 것에서 눈치 주는 대중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소비해주는 것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생산자로 바껴야 좌절의 시스템이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김수정 2018.12.05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강명 작가의 표백, 뤼미에르 피플, 5년만에 신혼여행을 최근에 읽었는데
    특히 소설을 읽으면서 어떻게 저런 구상을 할 수 있을까, 저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하고 참 궁금했어요.
    매력적인 작가세요. 소설과는 다르게, 5년만에 신혼여행은 옆집 일상을 보듯 편하게 읽었어요. 당선, 합격, 계급도 몹시 궁금해지네요. 좋은 책과 작가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5. littletree 2019.01.15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피디님의 독서일기를 통해 장강명 작가님 책들을 읽고 있어요. 이번 책도 4장까지 읽었는데 저릿저릿 다가오는 대목이 많네요. 좋은 책과 작가님을 소개해주셔서 제 일상이 점점 다채로워져요.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