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봄 드라마 <여왕의 꽃>에서 야외 연출로 일하고 있을 때, 회사에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와요. 김민식이 더 이상 드라마 제작에 손을 댈 수 없게 아예 타부서로 전출시키라고. 당시 저는 과로로 몸살이 심해 링거 주사를 맞으며 밤샘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너무 괴로웠어요. 드라마 연출이라는 일을 빼앗기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때 PD 교육원에서 교육 공지가 뜹니다. <PD 글쓰기 특강>이라고. '괴로울 땐 글을 쓰면 좀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신청했어요. 글쓰기 특강에 온 여러 작가들의 강의를 듣고, 매일 한 편씩 글을 썼지요. 그렇게 모은 글로 2017년에 낸 책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였어요. 책이 나온 후, PD 교육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어요.
<PD 글쓰기 특강> 수강생이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었으니, 이번엔 다른 PD 동료들을 대상으로 책쓰는 요령에 대해 강의를 하면 어떻겠냐고. 남에게 배운 빚은 갚아야합니다. 내가 배운 걸 다른 사람에게 다시 알리는 거지요. 그래서 글쓰기 특강 강사로 나섰어요. 강의를 준비하며 했던 여러 생각은 훗날 <매일 아침 써봤니?>에 다시 녹였어요. 공부는 이렇게 배움과 가르침으로 계속 순환합니다.
그날 책쓰기 특강에 온 YTN 라디오 피디가 한 분 있어요. 나중에 제가 MBC에서 김장겸은 물러나라고 외치며 싸움을 시작했을 때, 라디오 출연의 기회를 주셨어요. 방송에 나가 MBC 정상화가 왜 꼭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MBC에서 대기발령이 난 상태에서 회사 건너편 상암 YTN 사옥에 가서 왜 내가 싸우는지 이야기할 수 있어, 얼마나 고맙던지요. 방송이 끝나고 라디오 PD님이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본인도 책을 쓰는데 관심이 있다고 하셨어요. '글쓰기 강의를 들으러 오는 건 책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거다.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실천으로 옮겨보시라'며 응원했지요. 그 분이 이번에 <눈 떠보니 50>이라는 책을 냈어요. 책에는 저와의 만남 이야기도 나와요.
이 책 <눈 떠보니 50>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PD연합회에서 하는 'PD의 글쓰기 강의'를 들으러 갔다.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이 김민식 PD였다. 그는 방송국 생활이 20년 넘은 베테랑 PD였지만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이기도 했다. 큰 눈을 반짝이며 유쾌하게 강의하는 그를 보며 '저 선배 팔자 좋다. PD도 하고, 책도 쓰고'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김민식 PD는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연출 파트에서 배제되어 오랫동안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실 그는 팔자 중에서도 제일 사나운 팔자의 주인공이었다. 이후로 나는 그의 글쓰기 비법이 아니라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겪고도 저렇게 행복할 수 있는 비법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중략)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만으로 이 시간을 보낸다면 그건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생산적인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은퇴 이후 어떻게 살까를 미리 경험했어요. 은퇴 이후에는 돈은 부족하고 시간이 남잖아요. 돈이 들지 않는 취미 생활이 뭘까 하고 봤더니, 독서 아니면 여행이더라고요. 도서관에 가서 수만 권의 책 중에서 한 권을 골라 읽거나 북한산 둘레길, 서울 둘레길을 돌며 다니는 여행 등. 그런 것들을 즐기다 보니 또래 50대하고는 좀 다른 취미를 갖게 된 거죠."
(<눈 떠보니 50> 190쪽)
다른 이가 쓴 책에서 제 이야기가 나오니 참 신기하네요. 작년에 50이라는 나이를 맞으며 많은 고민을 했어요. 내 인생을 돌아보니 고마운 일이 참 많았어요. MBC는 방송에 문외한이었던 제게 PD라는 직업을 줬고요. 예능이며, 드라마며, 심지어 노조 부위원장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 준 고마운 회사지요. 이렇게 받은 게 많으니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공영방송 정상화 싸움을 시작한 제게 방송 출연의 기회를 주신 분들이 있어요. YTN 라디오 <당신의 전성기, 오늘>도 그중 하나지요. 많은 분들이 저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시신 덕에 회사가 정상화되고 저는 다시 드라마 연출이라는 생업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50, 세상에 받은 걸 돌려드려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빚은 오히려 쌓이네요. 김혜민 피디가 책을 내면서 제게 부탁을 했어요.
“선배님 덕에 세상에 태어난 책입니다.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에 선배님이 함께 해주세요.”
싸울 때, 내 편이 되어준 이들에게는 빚이 있다고 생각해요. 은혜는 갚아야 하고요. 내 책도 아니고, 감히 중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주제도 아니지만, 김혜민 피디의 부탁을 받아 북토크에 나가게 되었어요.
<눈 떠보니 50> 출간 기념 북토크, 김혜민 피디 + 정재찬 교수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김민식 피디.
11월 13일 화요일 저녁 7시 30분 서울시 중구 중림동 한경빌딩 다산홀
(신청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A6IguzCCL_S1uZahRlLtd9zdo_WdYkP01C6s2NPZPknGGZA/viewform
눈 떠보니 50이에요. 이 책을 통해 만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멋지게 나이 드는 삶의 지혜를 배우고 싶습니다.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횡단보도 위의 정의 (3) | 2018.11.23 |
---|---|
피해자가 치유자가 되기를 (13) | 2018.11.16 |
노력이 폭력이 될 때 (14) | 2018.11.07 |
성공의 기준이 너무 높다 (12) | 2018.11.05 |
의지는 일상으로 증명한다 (8) | 2018.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