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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횡단보도 위의 정의

by 김민식pd 2018. 11. 23.

도서관 저자 특강을 가면 가끔 이런 민망한 질문을 받습니다. 

"유튜브나 페이스북 동영상으로 선생님의 모습을 자주 접했습니다. 그렇게 용기있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저는 MBC 피디로 20년 넘게 참 즐겁게 살았어요. 생각해보니 그게 다 방송이 가진 힘 덕분이었어요. 전 제가 잘 나서 배우나 스태프들이 제 말을 따르는 줄 알았거든요? 한직으로 쫓겨나 괴로운 시절을 몇 년 보내고 나니, '아, 나는 참 외롭고 못난 사람이구나. 피디라는 직업이 준 권력에 취해 살았구나.' 하고 실감했어요. 내가 약자의 지경에 처해보니, 언론이라는 권력에 취해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볼 때마다 너무 괴롭더라고요. 이건 아니지 않은가. 이건 정의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의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재민 / 창비)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정의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악마가 디테일에 있듯이, 천사도 정의도 디테일에 있다. 가령 나는 우리 사회가 ‘횡단보도 질서’만 바로 잡혀도 훨씬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도로교통법상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가 우선이다. 자동차는 보행자보다 강자다. 갑을로 따지면 갑이다.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다시 말해서 ‘갑질’을 하면, 보행자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물러나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은 신호등이 없더라도 횡단보도에서는 약자인 보행자를 우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동차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어 설 때 법치주의와 약자 보호라는 인류의 멋진 관념적 발명품이 작동하는 것이다.

법이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이런 차원에서다. 재판에서 약자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법에서 특정 약자들을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약자의 입장에 처할 수 있는데, 그때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마구 짓누르지 못하도록 법이라는 장치를 설정해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횡단보도 위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횡단보도 앞에서 스스로 멈춰 서는 운전사는 그리 많지 않다. 보행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기 시작해야 비로소 자동차가 마지못해 멈추어 선다. 그렇게 불안감을 느끼면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나는 내 아이들의 안전이 불안해진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알림장에 일순위로 적힌 글이 ‘차조심’이다. 왜 아이들이 차를 조심해야 하는가. 차가 아이들을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선진국에서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 할 때 자동차가 먼저 지나가는 것은 위법일 뿐만 아니라 몰지각하기 그지없는 행위로 통한다.

횡단보도에서조차 도로교통법을 무시하고 힘이 센 운전자가 힘이 약한 보행자를 위협하면서 지나다니는 나라에서, 갑질이 없고, 소수자가 보호되고, 법이 지켜지는 문화가 과연 정착될 수 있는지 나는 심히 의문스럽다.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260쪽)


우리는 흔히 신문을 보며, 양승태의 사법농단이나 재벌들의 갑질 행각에 대해 혀를 끌끌 찹니다. 힘을 가진 이들이 그 힘을 이용해 약자를 괴롭힐 때, 우리는 분개하지요. 갑질은 권력층만 하는 걸까요? 우리도 갑질의 주역이 될 수 있어요.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는 약자고요, 그런 아이를 쫓아가는 엄마는 더한 약자에요. 그 앞에서 경적을 울리는 우리는 비정한 강자가 되고요. 정의구현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일상에서 조금 더 배려하면 됩니다. 

예전에 MBC 여의도 사옥으로 출근할 때는 회사에 주차 공간이 부족하여 63빌딩 앞 한강 공영주차장을 이용했어요. 주차장에 진입로에서 63빌딩에 소풍 온 유치원 아이들을 만나면, 시간이 한창 걸립니다. 대여섯살 난 아이들은 걸음이 느리기도 하지만 주의가 산만하여 63빌딩을 보고, 한강을 보느라 선생이 불러도 도로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기도 하거든요. 총각 시절엔 그런 병아리떼를 만나면 짜증이 일기도 했는데요. 첫 딸을 얻고 바뀌었어요. 아이를 키워보니, 그 시절의 아이들은 다 그렇더라고요. 부모 뜻대로 아이가 움직이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하고요. 결국 우리가 약자의 입장에 공감하는 건 그 입장을 겪어본 후입니다. 

저는 기득권을 누려도 봤고, 그 기득권을 빼앗겨도 봤어요. 빼앗기고 보니, 그 권력이라는 게 참 달콤한 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이 좋은 걸 가진 사람은 절대 순순히 내놓으려 하지 않겠구나. 그렇다면, 싸우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순순히 그걸 내려놓는 경우는 없거든요. 

저는 제가 책 읽는 선비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종일 책만 읽으며 살아도 좋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부조리에 눈감고 사는 건 선비가 아니라 그냥 비겁한 겁쟁이입니다. 책을 읽을 땐 책을 읽고, 싸울 땐 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나설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지요. 그게 내 인생에 대한 예의고, 책을 통해 저를 가르치신 스승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법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요? 법으로 서로의 경계를 정해주는 겁니다. 강자라도 약자를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경계를. 

저자인 정재민 님은 판사로 재직하며 소설을 여러편 쓰신 이력이 있어요. 이번 책은 에세이입니다. 글을 읽다보면 한 편의 시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해요. 철학자같은 깊은 고민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판사로 오래 재직한 저자가 우리 사회에 대해 내리는 판결문 같아요. 우리는 유죄일까요, 무죄일까요? 책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합니다. 매일 죄를 지은 피고들을 만나 형량을 가늠하는 저자가, 우리 사회에 대해 이토록 따듯한 판결문을 쓸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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