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었어요. <쇼코의 미소>를 무척 인상 깊게 읽었거든요. 소설의 경우, 주로 출퇴근하는 전철에서 읽는 편인데요.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다 중간에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는 경우가 많아요. 눈가에 눈물이 맺혀 고개를 들었다가 앞에 서 있는 승객과 눈이 마주칠 때는 좀 민망하지요. 이 대목을 읽을 때 특히 그랬어요.
엄마는 왜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지하철역 개찰구 앞에서 나를 계속 밀쳐 쓰러뜨렸을까. 일어서면 다시 때려 쓰러뜨리고, 일어서면 다시 때려 쓰러뜨리기를 반복했을까. 빨리 쫓아오라고 말했는데도 내가 걸음이 느려 엄마를 따라가지 못했으니까. 내가 꾸물거렸으니까 그랬겠지. 많이 맞았잖아. 그때마다 이유는 내게 있었다.
술에 취해 들어온 아빠는 왜 자는 나를 깨워 내가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애였다고 말했을까. 내가 미숙아로 태어난 까닭으로 처음부터 돈이 많이 깨졌다면서 나를 새는 바가지라고 불렀지. 화를 냈지만 슬퍼보였어. 사는 게 고되어서 그랬겠지. 돈도 없는데,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가지게 되었으니 힘들었겠지.
어린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 그 차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공무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고.
<내게 무해한 사람> 120쪽
어렸을 때 내 모습 같았어요. 어려서 공부 못한다고 아버지에게 무던히 맞았어요. 의대 갈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게 노력 부족이라고 말하며 아버지는 매를 휘둘렀지요. 나는 책을 읽는 게 좋다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싶지, 피를 보며 일하는 의사랑은 맞지도 않다고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세상에 저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먹고 살려고 하기 싫어도 참고 하는 거지. 네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 맞아야 정신 차린다, 너 같은 애는.”
아버지는 참 열심히 사는 분이셨어요. 학교에서 일하고 퇴근하고는 학생들 과외를 했어요. 그 시절에는 현직 교사도 과외를 할 수 있었거든요. 심지어 집에서 기숙과외를 하며 학생들 먹이고 재우고 하면서 24시간 학습 관리를 하셨지요. 학교에서도 일하고 방학에도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셨어요. 그렇게 열심히 사시는 분이니, 아들의 성적 부진은 노력 부족 탓이라 여기셨지요.
직장에서도 가끔 그런 상사가 있어요. 후배가 해 온 일을 보고 분노를 터뜨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그런 사람의 특징은요. 자신은 무척 열심히 산다고 믿는 거죠. 타인은 게으르다고 생각해요. 일을 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하지만 타인과 내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요. 오로지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은 의욕이 없거나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요.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면 불안해요. 타인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그 실망은 분노가 되어 폭력의 형태로 분출되기도 하니까요.
아버지를 보며 결심했어요. 행복한 어른이 되자고. 행복한 어른이 좋은 부모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이에게는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말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일하고, 결과는 그냥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실컷 했으니 그걸로 됐다, 과정을 즐기면 되지 결과까지 욕심내지는 말자고 생각해요. 성과를 놓고 나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고 생각해요. 나에게 관대한 사람이 타인에게도 관대할 테니까요.
109쪽에 나오는 글에 또 멍해졌어요.
‘왜 병든 사람들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그렇게 느꼈어요. 당신들의 삶이 불행하다고, 아이들에게 그 불행을 전염시키는 게 과연 부모의 역할인가? 자신은 절망해도 아이에게는 희망을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저런 부모를 만난 자식은 다시 불행한 부모가 되는 걸까? 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내가 어른이 되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가정폭력을 겪고 자란 아이에게 희망이 있을까?
“사람은 변할 수 있어. 그걸 믿지 못했다면 심리학을 공부할 생각은 못했을 거야.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136쪽)
소설 주인공의 말이 나 자신을 향한 다짐 같아요. 독서를 통해, 글쓰기를 통해, 계속 공부를 합니다. 어려서 내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지우고 싶어요. 내 속의 상처가 다른 사람의 상처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무해한 부모가 되는 것, 그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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