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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경제적 인간'의 종말

by 김민식pd 2018. 8. 27.

제가 경주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가족 외식을 가면 토끼 불고기를 먹었어요. 어려서 토끼 고기를 먹었다는 얘기를 하면 아이가 놀라요. 제가 고기를 좋아하는데요. 어린 시절에는 미역국 올라오는 날이 소고기 먹는 날이었어요. 몇 점 들어간 소고기를 맛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일상에 올라오는 미역국을 기다렸지요. 저는 중학생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돼지 갈비라는 걸 먹어봤어요. 그 시절에는 돼지 고기도 귀했거든요. 70년대에 시골에서 흔하게 접하는 고기는 염소나 토끼였어요. 바나나도 얼마나 귀한 과일이었는데요. 아내의 돌 사진에는 바나나가 소품으로 놓여져 있는 거 보고 완전 부러웠어요. "당신 어렸을 때 집이 부자였구나! 바나나도 먹고."

요즘 마트에 가면, 전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먹거리가 예전에는 꿈도 못꿀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나옵니다. 바나나도 싸고, 키위며, 멜론이며 온갖 신기한 과일이 다 싸요. 칠레 와인에 스페인 이베리코 햄이 이렇게 싸질 줄 몰랐어요. 전세계에서 가장 맛있다는 걸 다 먹을 수 있어요. 100년 전에는 왕도 먹지 못한 식단을 우리가 즐기지요. 이렇게 윤택한 시대를 사는데 왜 우리는 사는 게 힘들까요? 

사람은 2가지를 비교한답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남과 나를 비교하죠. 과거에는 흔했던 평생 직장이 이제는 드물고요. 과거에는 흔했던 부동산이나 주식 대박의 기회가 이제는 사라졌어요. 남과 나를 비교하면 내가 그렇게 초라할 수 없어요. 세상에 나보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재벌들이 버는 돈은 비교 자체가 힘들 정도에요. 그렇게 많이 버는 재벌들도 스트레스가 많은 가 봐요. 항상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며 삽니다. 저렇게 돈 많은 사람도 더 벌겠다는 욕심에 사람들에게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나는 뭘 믿고 이렇게 태평하게 일을 할까? 생각하면 문득 기가 팍 죽습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 (피터 플레밍 / 박영준 / 한스미디어)라는 책이 있어요. 더 많은 노동이 더 많은 부를 가져준다는 생각은 이제 착각이라고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왜 '지옥 같은'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가?

왜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참고 또 참는가?

어째서 열심히 일해도 계속해서 빚만 쌓이는가?

저도 늘 궁금한 질문이에요. 돈에 집착하고 싶지 않아도 결국엔 돈 때문에 절절매고, 휴식이 간절했지만 자녀의 학원비 때문에 과도한 업무를 버텨내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고통도 모른 척 해야 했던, 슬프고 외로운 '호모 이코노미쿠스'들. 남 이야기같지 않죠?

호모 이코노미쿠스란 경제적 인간으로서, 오직 금전의 취득이라는 목표에 따라 동기부여 되며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특히 '공공'은 절대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윤추구의 경쟁을 부채질하는 속성상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쏟아냅니다. 환경오염, 스트레스, 불안감, 빈곤 등. 수익만을 추구하는 행위에 따른 필연적 폐해지요.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자본주의가 배출한 오물을 자신보다 힘이 약한 다음 집단에게 떠넙깁니다. 그게 자유 시장 기반의 자본주의가 앞세우는 '합리성'이나 '효율성'의 진정한 의미에요. 대개의 경우, 빈곤층이나, 여성, 이민자, 자연 환경이 희생양이 되는데요. 오랫동안 사회 전반에 '경제적 인간'을 확산시켜온 결과, 호모 이코노미쿠스 자신이 배설물 사슬의 맨 끝에서 서서히 오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ㅠㅠ 승자 독식 구조는 이래서 무서워요.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라는 생각이 결국 '다같이 죽는' 결과로 이어지거든요. 


예전에 읽었지만, 드라마 연출 중이라 리뷰는 이제야 올립니다. 쉽게 글을 쓸 수 있는 가벼운 주제가 아니거든요. 오랜만에 책을 펼쳤다가 뒷표지에서 멈칫했어요. 고 노회찬 의원의 추천사가 있네요.


'자유로운 시장'에서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은 왜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는가? 부는 물론이거니와 행복은 어찌하여 점점 요원해지는가?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경제적 인간의 합리성의 신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는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는지 적나라하게 분석한다.

- 노회찬 (국회의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에요. 이 책을 읽으면 돈에 얽매여 사는 삶에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요?

문득 한겨레 신문 8월 24일자 '책과 생각'에 나오는 '이주의 문장'이 떠오르네요.


"교양인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교양의 개념을 대표하는 이 말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라는 뜻은 없습니다. 지식의 힘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지식은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뭔가를 아는 사람은 불빛이 반짝거리는 곳으로 무작정 홀릴 위험이 적고, 다른 사람이 그를 이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 <피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은행나무)에서


문득 마트에서 만난 세계에서 온 먹거리들이 떠올라요. 많은 먹거리를 바구니에 담습니다. 수십만원의 돈을 카드로 결제하지요. 월급날이 지나면 돈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잠시 고민하다, 냉장고 냉동칸에 꽝꽝 얼어붙은 이베리코 햄을 꺼내어 버립니다. 어린 시절, 외식 가서 염소 불고기를 먹으며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지금은 가장 윤택한 시대가 아니라, 가장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시대가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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