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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당신도 누군가의 고민거리

by 김민식pd 2018. 8. 29.

드라마를 연출하는 동안, 드라마 피디는 고도 긴장 상태에서 일을 합니다. 특히 촬영을 할 때 그래요. 모니터 속 그림에 뭔가 이질적인 장면은 없는지 살핍니다. 화면 귀퉁이에 걸린 조명기나 스탭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요. 배우의 동작이 풀샷과 다르면, 편집할 때 튑니다.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도 꼼꼼히 맞춰야 합니다.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도 집중합니다. 대사의 톤이나 억양이 어색하지는 않은지 계속 주의를 기울입니다. 노동의 강도와 밀도가 높다보니 일이 끝나면 약간의 허탈감에 빠지고요. 우울해지기도 해요. 

6개월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 다시 혼자가 됩니다. 이 시간이 제게는 너무 편하고 좋은데, 그러면서도 외로움을 느껴요. 집에서 지내면서 가족과 부딪히기도 하고요. 아내와는 사사건건 다투게 됩니다. 드라마 연출 중에는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이제 매일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마다 갈등이 되어 올라와요. 술 한 잔 하며 툭툭 털면 좋겠지만, 낯가림이 심한 성격이라 누구를 만나는 것도, 나가는 것도 힘들어요. 사는 게 다 고민인데, 어디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어요. 이럴 때 역시나 저는 책을 찾습니다. 사람에게 답을 구하지 않아요. 책이 제게는 더 편해요. 고민상담해주는 책도 많습니다.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나 '강신주의 다상담' 같은 책을 즐겨 읽는데요, 요즘 새롭게 제 마음을 두드리는 고민 상담 선생님이 있어요. 바로 김보통 작가입니다. 


<살아, 눈부시게!> (김보통 / 위즈덤하우스)


누가 물었어요. 

"재능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김보통의 답.

"타인의 지속적 노력의 결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말."


확 와닿습니다. 


"타고난 사람을 이기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냈을 고민과 노력의 시간을 우선 인정해야겠지. 그리고 그 사람을 이겨야 내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란 사실도 깨달아야 하고."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홈페이지를 십 년 동안 운영했는데, 그때의 시간이 지금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내가 보기 위한 글을 쓰던 시간들. 물론 홈페이지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오진 않습니다. 그동안 써 둔 글은 다 숨겨 놓아서 사실 볼 것도 없지만!

(위의 책 82쪽)


드라마가 끝나고 책을 닥치는대로 읽는 중입니다. 지금도 책상 위에는 '복학왕의 사회학' '콘텐츠의 미래' '서울 선언' '스토리텔링 연습' '마음아, 넌 누구니' '실리콘밸리를 그리다' 등의 책들이 쌓여있어요. 이렇게 책을 읽다보면 주눅이 들 때도 있어요. 세상에 좋은 책이 이렇게 많은데 감히 나 따위가 무슨 책을 쓴다고..... 그러다 다시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겨우 나 정도 되는 사람도 책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쓰고 싶은 사람이 쓰는 거지, 재능이 뭐가 필요해.' 라고 다시 마음을 근근히 붙잡아맵니다. 최고의 재능은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못하거든요.


만화가 지망생이 물었어요.

"스물 두 살 만화가 지망생입니다.

졸업은 점점 다가오고, 집에서는 압박 주고, 만화를 그리려고 하면 개연성은 있는지, 등장인물은 매력이 있는지, 그림체는 괜찮은 건지 고민이 되어 힘듭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열등감에 빠져 더 괴롭고요. 

그러면서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아 괜히 자책하게 됩니다.

따끔한 충고 부탁드립니다."

김보통 작가의 답.

"그래서 오늘 몇 장 그렸는데?"

(위의 책 160쪽)



책 첫장을 펼치니 작가님이 제게 화두를 던집니다.


"하지만 당신도

누군가의 고민거리!"


확 와닿습니다. 나는 누군가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누군가는 나로 인해 괴로울 수도 있으니까요.



귀여운 만화 캐릭터들이 웃으며 하는 말들이 마음을 콕콕 찌르네요. 늘 느끼지만, 김보통 작가는 보통이 아니에요.

힘들 땐, 책을 읽습니다. 위로는 책 속에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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