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대학원을 다니고 MBC에 입사한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나름 활발한 연애를 즐겼습니다. 통대와 방송국, 둘 다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 많은 곳이거든요. 신인 탈렌트도 만나고, TV 리포터도 만났지만, 결혼은 통역사와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2개 국어를 하는 사람들은 왠지 사고가 자유로운 것 같았거든요. 제게 있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거든요. 타인의 시선이나 잣대로부터의 자유. 나로 온전하게 살기.

1990년대, 남성 우위의 시대였는데요. 그래도 영어를 잘 하는 여자들은 왠지 자유로워 보였어요. 외국 문화를 접한 탓인지 훨씬 더 진취적이고 자신감이 컸어요. 통역대학원 후배와 결혼했는데, 아내는 무척 독립적인 사람입니다. 첫 아이를 낳고 미국 유학을 떠나고, 나이 40에 해외 파견 근무에 지원했어요. 외국에 혼자 나가 아이 둘을 키웠어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아내는 망설이는 법이 없어요. (누가 그러더래요. "그렇게 외국에 나가서 생활하다 혼자 남은 남편이 바람이라도 나면 어떡할래?" 이렇게 대꾸했답니다. "울 남편 생긴 걸 못 봐서 그래. 그런 건 전혀 걱정 안 해도 된단다." 못생긴 남편을 둔 여자는 운신의 폭이 넓어서 좋겠...)


활자중독자인 저는 페이스북에서 사람들이 쓴 글도 즐겨 읽습니다. 언젠가부터 페이스북에 '조이스 박'이라는 분의 글이 자주 눈에 띄더군요. 페친들이 공유하는 그 분의 글이 다 재미있어요.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을 가진 글이라 읽는 맛이 있어요. 이 분은 어쩜 이렇게 재미난 글을 쓰는 걸까? 알고보니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에 유학하며 TESOL을 공부한 분이더군요. '아, 2개 국어를 자유롭게 하는 덕에 사고의 지평을 더 넓힌 분이구나, 역시!' 했어요.

그 페이스북의 필자가 책을 냈어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조이스 박 / 스마트북스)

어려서부터 읽은 동화들이 있지요. 빨간 모자, 라푼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익숙한 동화 속에서 숨어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 보여주는 책입니다.

'푸른 수염'에게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있어요. 여러번 결혼했는데, 그 아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요. 그 푸른 수염이 새 신부를 맞습니다. 성을 둘러보며 이야기하지요. 1층 복도 끝 작은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신부가 방문을 엽니다. 그 안에는 푸른 수염의 아내들이 시체로 쌓여 있어요. 푸른 수염에게 들켜 죽임을 당하려는 찰나, 언니와 오빠들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지요. 

작가는 '푸른 수염'을 현실에서 만나는 '나쁜 남자'로 비유합니다. 푸른 수염의 방마다 가득 찬 금은보화와 멋진 가구, 연일 벌어지는 파티들이 나쁜 남자가 가진 수많은 치명적 매력이라고요.

 

열 가지 중에 아홉이 좋고 하나가 거슬리지만, 그 하나를 애써 무시하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하나가 견딜 수 없어지고 결국 남은 아홉 가지를 다 팽개치고 싶은 패착으로 돌아온다. (중략) 

달콤한 로맨스, 열광적인 구애를 거쳐 결혼하고 안착하면, 혹은 장기적인 연애로 접어들면, 이제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어두운 구석의 작은 방에 갇혀서 여자를 부른다. 처음에는 커다란 성 전체에서 아주 작은 방 하나일 뿐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성 전체를 다 전복할 만한 무시무시한 비밀을 안고 속삭여온다. (중략)

푸른 수염이 절대 열지 말라던 작은 방의 문을 열었더니 죽은 아내들의 피투성이 시신들이 쌓여 있었다. 여자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살육당한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게 된다. 자신이 상처 입었음을 비로소 인지하는 것이다. 여자는 비로소 무수한 상처들이 치유받지 못한 채 내면 한구석에 유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위의 책 20쪽)


익숙한 이야기를 이렇게 낯설게 풀어내는 작가라니, 천상 이야기꾼이네요. 이런 작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세상의 구석에서 '유색인종,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피부양자가 딸린 비혼자'라는 지표들을 달고 생존한 것이 성공이라 자축하며 산다. 어쩌다 보니 가진 재주가 영어라 강의를 하다가, 바쁘고 힘든 삶에 겨워서 쓰러졌던 순간에 글이 터져 나오면서 한국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 소개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며 <하루 10분 명문 낭독 영어 스피킹 100>, <스피킹에 강해지는 영어회화표현 Best 100>등의 영어 교재를 쓴 작가가 어느 날, 전래 동화 속 주인공들의 사연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상처 입은 마음을 정직하게 살피는 시간'이라는 책 소개가 와닿습니다. 독서가 주는 힘이 여기에 있고요, 글쓰기의 효용이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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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18.06.27 0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헉.. 피디님도 아시는 분이셨군요. 저도 예전부터 이 분 팔로워여서 페북에서 이 분글 재미있게 읽고 있죠. ^^
    근데, 이 책 나왔다는 글을 보자마자 바로 샀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네요. ^^;;;

    저는 처음에 이분이 영어 강사인지 모르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술술 읽혀서
    글을 잘 쓰시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었죠..
    오늘 피디님 독서일기를 읽으니 이번주에 꼭 읽어봐야겠어요. 내용이 너무 궁금해요. ^^
    요즘 책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어요.
    피디님 추천 책도 읽어야 하고, 도서전에서 산 책도 읽어야 하고.....ㅋㅋㅋ
    오늘도 독서일기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즐겁고 신나게 촬영하시길 바라며
    마님바라기 사랑꾼 김민식 피디님 파이팅~~~~

    첨고로, 혹시 '조이스 박' 저자분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분 페이스북에 있는 글들을 함 읽어보세요. ^^
    https://www.facebook.com/joyce.park1

    #이별이_떠났다
    #매주_토_20:45
    #본방사수
    #안되면_다시보기_몰아보기


  2. 보리보리 2018.06.27 0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국어를 하면 또다른 인격을 갖는대요
    다개국어가 되면 더 오픈이겠네요? ^^
    영어점수만 높고 말은 대충 하면 아닐테죠?

  3. 꿈트리숲 2018.06.27 08: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못생긴 남편을 둔 여자는 운신의 폭이 넓어서 좋겠... 에서 빵 터졌어요.^^

    제가 영어를 잘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자유로워 보여서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나봐요.

    피디님도 조이스 박님도 2개국어 능통자여서 운신의 폭이 넓으신 듯 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여행하며 자유를 닮고 싶어요.^^

    꿈트리숲=정지영입니다.

  4. SORA& 2018.06.27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꼭 읽어봐야겠네요...^^
    아직 남은 조선시대 남편이 푸른수염이네요.. 20세기에서 18세기로 멋모르고 끌려간 현대여성을 서서히 쥑이는 ㅋㅋ 21세기에 정신차리고보니 오십입니다~ 하하하

    저도 언제나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이 책이지요..고 박완서 작가님처럼 마흔에도 가능하다 꿈꾸다 어느새 오십이 되어버렸지만요^^

    장바구니 찜해놓고 ebook 기다립니다..밤에 혼자 어둠속에서 탭열고 볼 수 있어 좋거든요 ㅎ

    A book that is shut is but a book....Thomas Fuller

  5. 안가리마 2018.06.28 16: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영어 전공자로서 많은 공감이 됩니다.
    사실 영어 전공했다는 사실이 오랜 시간 후회스러웠는데
    달리 생각하니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 꼭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아리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