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여름, 저는 아버지와 남해 상주해수욕장으로 캠핑을 갔습니다. 모래사장이 길게 늘어선 해변 한 쪽에 텐트를 쳤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남해 고등학교에서 보이스카우트 지도 교사로 일하셨는데요. 평소 학생들과 야영을 다니며 익힌 솜씨를 뽐내며 텐트를 치고, 버너와 코펠로 모래사장에서 식사를 준비하셨지요. 날이 조금 흐려진다 싶었는데 인근 부대 군인들이 와서 큰 비가 올 테니 텐트를 걷고 철수하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꽃삽을 꺼내들었습니다. “비 좀 온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지. 봐라. 이렇게 텐트 주위로 물길을 내면 된단다.” 열심히 텐트 주위를 꽃삽으로 파고 있는데 육군 중령이 나타났어요.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태풍으로 해안선 긴급 대피령이 떨어졌단 말입니다.” 주섬주섬 텐트를 걷어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어요. 그게 1981년의 태풍 아그네스였습니다.


방송 PD로 20년 넘게 일을 한 저는 요즘 방송가가 폭풍전야 같아요. 공중파의 시장 점유율은 날로 떨어지고,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약진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예전에는 방송3사끼리 경쟁했는데요, 이제는 세계 초일류 기업과 경쟁하는 신세입니다. 지난 10년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그리고 구글, 4대 플랫폼 기업들이 보여준 성장세는 두렵기만 합니다. <플랫폼 제국의 미래> (스콧 캘러웨이 / 이경식 / 비즈니스북스)는 ‘디지털 시대를 지배하는 거대 테크기업의 성공 전략과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파헤친 경영서’입니다. 신이 된 구글, 모든 것을 파는 아마존, 전 세계인의 친구인 페이스북과 가장 섹시한 명품이 된 애플의 성공에 대해 들여다보는데요,  IT 공룡들의 플랫폼 전쟁의 최전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자비한 일자리 살육입니다.


아마존은 유통업계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파괴적인 최상위 포식자라고 불리는데요. 아마존의 등장 이후, 전통 소매점이 문을 닫고, 백화점이 지점을 줄이고, 대형할인점이 맥을 못 추고 있어요. 미국의 경우, 소매유통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계산원 340만명, 매장 직원 280만명, 창고 직원 120만 명 등인데요. 아마존의 무인점포인 아마존 고, 물류 창고 로봇 키바, 여기에 드론 배송까지 등장한다면, 이들 노동자가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 겁니다. 



‘불과 한 세기 만에 농업 종사자 비율은 50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줄어들었고, 앞으로 30년 안에 소매유통업 종사자 비율이 비슷한 규모로 줄어들 것이다.’ 책에 나오는 예언에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아마존의 성장으로 2017년 한 해에만 소매유통업 분야 일자리 7만6000개가 사라졌습니다. 요즘 제프 베조스는 ‘보편적 최저소득’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구글 등 4대 제국이 지배하는 미래에 노동자가 설 자리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퇴직 후 세컨드 커리어로 소호 창업이나 인터넷 쇼핑몰 운영을 고민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장사가 잘 될까를 고민하기 전에 이 책부터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야영 용품을 챙기고 꽃삽을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캠핑 가기 전에는 주말 일기예보를 미리 확인해야지요. 태풍이 몰려오는데 모래사장에 물길을 낸다고 삽질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영화 <폭풍 속으로>를 보면 패트릭 스웨이지가 연기한 아드레날린 정키 보디는 태풍 예보를 듣자 서핑 보드를 들고 바다로 달려갑니다. 일자리의 미래에 거대한 파도가 올 때, 피할 수 없다면 즐기고 싶어요. 밀려오는 파도를 앞두고 서핑 보드를 닦는 자세로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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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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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18.06.18 0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제가 예전에 스마트폰이 초기에 나왔을때 들은 얘기중 하나가...
    Apple 기기(아이폰)로
    Amozon 쇼핑몰 가서 제품을 구매하고,
    Google 서비스(검색, 메일, 캘린더) 를 이용하는게
    일반적인 모습이 될거다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느 순간 제가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하는 일이 이들 IT 공룡들과 관련이 많아
    플랫폼 기업들에 관심이 많은데요.
    앞으로 상상 이상의 더 큰 파도가 올거 같은데 정말 걱정이 많이 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그 파도위에 잘 올라탈지
    다시 한번 생각들을 정리해봐야겠어요. ^^
    오늘도 좋은 생각꺼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겁고 신나게 촬영하세요.
    믿보연 김민식PD 파이팅~~~~


    #이별이_떠났다
    #매주_토_20:45
    #본방사수
    #안되면_다시보기_몰아보기
    #민식사랑_인스타 @minsiklove

  2. 2018.06.18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며칠전에 플랫폼 관련 책 읽고 미래가 무서워서 식욕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 전엔 인공지능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다룬 책(슈퍼 인텔리전스)을 읽고 또 며칠 식욕을 잃었었는데요. 저 책은 진짜 암울해서 제가 80살쯤 됐을때 제 후손들이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는 거 아닌지 불안할 정도였어요. 피디님. 초반부에 감정이입하기 쉬운 사건을 들려주고, 그 뒤에 플랫폼 얘기를 꺼내니까 기억에 더 잘남아요. 저도 다음에 어려운 걸 설명할때 이렇게 써봐야겠어요.

  3. 아리아리짱 2018.06.18 0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아리!
    미래를 예측하고 읽는 눈을 가지게 해주는 독서
    가이드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바쁜 와중에 성실한 글쓰기와 올리기 존경합니다.
    ^^

  4. 정지영 2018.06.18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IT가 몰고올 미래의 태풍이 저는 그저
    걱정만 되는 건 아니고 한편으론 기회이자
    축복일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기술발달이 순기능만 하는 건 아니지만
    스마트폰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이전보다는
    더 편리하고 더 다양한 것을 실험해보는
    기회가 많아졌다고 믿거든요.

    아마존의 한해 R&D 예산이 우리나라 한해
    전체 R&D 예산보다 많더라구요. 미래는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준비는 독서네요.
    통찰력을 키워 다가올 거대한 파도에
    올라타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독서에 더 의미부여할 수 있게 해주신 오늘 글,
    감사합니다.^^

  5. 양선아 2018.06.18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난주 이별이 떠났다를 안하더라고요. 본방 사수 하고 있는데 말이죠. 흑흑. 바쁘실텐데 틈틈이 이렇게 글도 올리고 책도 읽으시고 대단합니다. 피디님의 부지런함과 열정을 존경합니다!!! 이 책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6. 정은 2018.06.18 1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려운 얘기는 모르겠지만, '이별떴..' 결방은 속상하네요. ㅜ.ㅜ
    재밌고 공감가는 컨텐츠라면, 시청자들은 MBC에 고정!! 박제!! 되어있을꺼예요.
    '이별이 떠났다'처럼요.
    더위날씨에 촬영하시느라 애 쓰실텐데,.모든 분들 건강 유의하시고, 월드컵 덕분에 여유시간도 틈틈이 누리시길요. (아마 감독님은 또 책 읽으시겠지요? ^^)

  7. 안가리마 2018.06.18 1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 현재에도 충실해야겠지만 큰 그림도 그릴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책에서 본 구절입니다. '석양을 보며 일출을 볼 줄 아는 것이 지성이다'. 감사합니다.

  8. 안가리마 2018.06.18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의 책 매일 아침에 써봤니를 거의 다 읽은 독자입니다. 급 블로거라는 매체에 관심이 생겼고 피디님의 블로그에 단골로 등장할 것을 다짐합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9. 미아 2018.06.18 2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장 편리한 것만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고 보니 염려되는 부분도 많네요...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10. 김경화 2018.06.19 0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그런거 같아요~ 40대 가 넘은 저도 요즘 넷플렉스라는 플랫폼으로 다양한 미드와 미영 그외 콘텐츠를 접함과 동시에 유튜브의 세계를 알고 구독이라는것도 하고 있지말입니다. 요즘 대학교 근처 스터디카페라는 곳도 갑니다. 커피값 한잔정도이지만 공부를하기위해 장소와 시간을 삽니다.
    또 요즘은 1인기업 컨설팅 하시는 분들도 많아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조언을 사기도 하지요. 그래서 쉽게 조언이나 충고도 하기 어려운 ,조심스러운 세상인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