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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이토록 로맨틱한 여행기

by 김민식pd 2018. 3. 6.

장강명 작가님의 에세이, <5년만에 신혼여행>을 읽었어요. 처음 책을 잡았을 때는, 결혼 후 5년만에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지요. 저는 MBC 예능국 조연출로 일하던 나이 서른 셋에 결혼했는데요. 2000년 당시 2주간 신혼여행을 떠났어요. 여행 중독자인 저는, 예능 조연출 시절 강도 높은 노동에 지쳐있었어요. 여행을 가고 싶은데, 최고의 알리바이가 바로 신혼여행이었어요. 주간 단위로 돌아가는 프로그램 조연출의 경우, 대개 1주일 정도 결혼 휴가를 내는데, 저는 2주간 냈어요. "평생 한번 가는 신혼여행, 멋지게 다녀오고 싶습니다!" 하고 외쳤지요. 제가 없는 동안 선배 연출이 빡세게 고생을 했지만, 뭐.... 평소에 내가 열심히 일했으니까... ^^ 그 이후로 MBC 예능국에서 휴가를 2주씩 내고 신혼 여행 떠나는 일이 많아졌다는 거. 역시! 직원 복지 증강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자뻑'에 취해삽니다. 일은 몰라도, 노는 데는 제가 선수거든요. ^^

직장인에게는 최고의 알리바이가 될 신혼여행 카드를, 장강명 작가는 5년 뒤에야 쓰는군요. 기자로 일하며 휴가를 내면,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한 편씩 쓴다는 이야기에 머리를 칩니다. '작가는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책을 쓴다는 핑게로 여행을 다니는 저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장강명 작가는 공대를 나와서, 언론사를 다니다, 책을 냈는데요. 책 첫머리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대체로 무언가를 때려치우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면서 정체성을 쌓아오지 않았나 싶다. (중략)

군대에 있을 때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병장 때쯤. 기자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결심을 한 게 맞지만, 공업수학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적어도 공학을 더 공부하는 게 내 길이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공업수학 강의를 들으면서 그때까지 평생 어떤 공부를 하면서도 얻지 못한 교훈을 배웠다. 바로 '아, 내 머리는 여기까지구나'라는 깨달음이었다.


(<5년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 한겨레 출판 17쪽)


확 와닿았어요. 저는 대학 다닐 때, 공업수학이 늘 F였어요. 성적이 나오면 동기들을 수소문해서 C가 나온 친구를 찾습니다. 그들 중에는 교수님께 부탁해서 아예 F로 처리해달라고 하는 이도 있어요. 재수강을 해서 학점을 높이려는 거지요. 학점관리를 위해서. 저는 그런 친구랑 함께 교수님 사무실을 찾아가요. "저랑 이 친구랑 학점을 바꿔주시지요. 이 친구는 재수강을 원하니 F를 주시고, 저는 재수강 한다고 성적이 좋아질 리가 없으니 그냥 D를 주시면 어떨까요?"

공업수학을 공부하면서 좌절했어요. '아, 나는 머리가 나쁜 사람인가 보다.' 괴로운 수학을 재수강하느니,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영문 소설이나 마음껏 읽자.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영어책을 들고 사니까, 영어가 술술 늘더라고요. 이후 저는 제가 못하는 일에 굳이 공을 들이지 않아요. 좋아하고 잘 하고 싶은 일에 노력을 기울입니다.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 없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그것만 열심히 하고 살자는 주의입니다. 현실이 힘들 땐, 현실도피도 도움이 됩니다. 


장강명 작가에 대한 나무 위키 소개를 보면, 

'어렸을 때부터 SF를 좋아했고, 하이텔의 과소동(과학소설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단편을 올린 적이 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월간 SF 웹진' 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잡지도 창간해 운영했다고 한다'

저 역시 SF 마니아에 나우누리 과학소설 동호회에 아시모프 단편을 번역하며 활동했지요. 그래서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하고요. 장강명 작가의 다채로운 이력을 보면서, '어쩌면 이분도 SF를 즐기면서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를 꿈꾸는 게 훈련이 된 덕분에 이런 멋진 삶을 즐기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책이 주는 최고의 미덕은, 힘든 현실로부터 즐거운 도피를 제공한다는 점이지요. <5년만에 신혼여행>은 장강명 작가가 아내와 함께 4박 5일 보라카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인데요. 읽으면서 머릿속에 몇년 전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온 풍경이 그대로 그려졌어요. 한번도 가보지 못한 페어웨이 리조트에서, 마치 발코니에 내놓은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망고 셰이크를 마시는 듯한 기분?

<5년만에 신혼여행> 

여행기인줄 알았는데, 달달한 로맨스 소설 한 편 읽은 느낌이에요. 소설가 장강명의 내밀한 속내를 엿볼 수 있어 좋았고요. 

여행을 떠나고 싶은 분이나,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분이나,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에세이입니다.

떠날 수 있어서 좋고, 돌아올 수 있어 좋은 것이 여행이거든요. 본격 리뷰는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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