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선 선배의 연출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조의 여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건 드라마 연출을 공부하는 데 있어 큰 경험이 되었다. 이후 나는 고동선 선배를 통해 김인영 작가를 만났다. 두 사람은 메리 대구 공방전의 연출과 작가로 함께 작업했는데, 김인영 작가가 준비 중인 로맨틱 코미디의 대본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미니시리즈의 메인 연출을 맡게 된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게 된 계기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김인영 작가가 이전에 성공시킨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후속편으로 예전에 미국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를 즐겨 본 내게 욕심나는 대본이었다.

 

장기인 로맨틱 코미디인 만큼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들어간 작품인데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무엇보다 대진 운이 너무도 나빴던 것이, 첫방송이 나가기도 전에 경쟁사 드라마 추노는 전작인 아이리스의 뒤를 이어 첫 방송에 20%를 넘기고 방송 4회차에 30%를 넘기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방송가에는 사극이 시청률 30%를 넘기면 후발주자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는 속설이 있는데, 직접 겪어보니 실감났다. 그리고 왜 드라마 PD 공모 마지막 질문이 당신은 운이 좋은가?’였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대진 운도 성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판이구나.

 

시청률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독려하며 추운 겨울에 밤샘 촬영을 진행하며 드라마 PD의 길은 참으로 가혹하구나.’ 하고 느꼈다. 물론 고통 끝에는 깨달음이 온다. 미니시리즈는 1,2회 내에 성패가 갈리는데, 이야기 전개에 있어 초반 승부를 놓친 건 두고두고 뼈아픈 실수였다.

 

시트콤과 드라마의 차이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시트콤은 캐릭터로 승부하고 드라마는 서사로 승부한다. 즉 시트콤은 어느 정도 방송이 나가고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면서 더욱 이야기가 재미있어 지는데, 드라마는 무조건 초반에 강한 사건 전개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경우 초반에 세 노처녀가 어떻게 골드 미스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캐릭터를 굳히느라 극적인 사건 전개가 약했던 것이 자충수였다.

 

지는 싸움도 즐겁게! 성공에선 자만심만 늘고 패배에선 교훈을 배운다!’는 최대한 긍정적 마인드로 버티긴 했지만 방송이 나가는 내내 무척이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고 한 달 후, 다시 회사에서 부름을 받았다. 2달 후 촬영 시작하는 50부작 주말 연속극의 연출을 맡아줄 수 있느냐고... 다시 패장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를 외치며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만든 글로리아, 불륜과 이혼과 복수가 난무하는 주말극들 사이에서 차별화된 주말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젊은 층의 감성에 호소하는 트렌디한 이야기로 승부를 걸었는데... 급하게 들어가다 보니 준비가 부족해서 촬영하면서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50부작 정도 되는 연속극은 좀 더 오랜 시간 작가와 함께 기획을 하며 이야기에 많은 공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라마로 옮겨온 후, 3년간 4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예능과 드라마의 차이? 예능은 팀워크가 강하고 드라마는 독불장군이다. 예능은 연출의 기회가 자주 오지만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기는 쉽지 않고, 드라마는 스타 연출가의 기회는 열려있지만 좋은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결국 선택은 자신의 성향에 달려있다. 둘 다 밤새고 고생하는 일이니,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밤을 새야 덜 힘들 것 아닌가?

 

PD WHO & HOW에 글을 쓴 지, 10년이 다되어 가는데, 1권 초판을 꺼내 들고 보니 표지에 MBC 교양국 PD 두 사람이 눈에 띈다. 한학수와 이춘근 PD. 책이 나온 후, 한학수 PDPD수첩 황우석 취재로 PD 저널리즘의 한 획을 그었고, 이춘근 PDPD수첩 광우병 보도로 경찰에 체포되는 영광까지 누렸으니, 홍경수 PD님의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난 지난 10년간 시트콤과 드라마를 오가며 시행착오만 반복해온 것 같다. 세월이 흘러 10년 후, PD WHO & HOW 3권이 나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대박 PD의 길이라는 다소 거만한 제목으로 글을 꼭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글을 마친다. 회사에 들어오는 신입 PD들이 책에서 글로 먼저 만난 인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반가웠다. 여러분도 언젠가 현장에서 만날 그 날까지 건승하시길!


(곧 출간될 PD WHO & HOW 2권에 기고한 글입니다. 편집 순서를 보니, 이 글 바로 다음이 곽정환 감독님이 쓴 '추노' 제작기더군요. 아, 정말 민망합니다~^^ 언젠가는 나도 기필코 대박 드라마 제작기를 쓰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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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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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rystal 2011.10.10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박작가되시면꼭사인회하셔야해요^^

  2. 김효진 2011.10.12 16: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드시 mbc pd가 되어서 후배로 찾아뵙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와 끈기를 배워습니다. 제가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탐구해보겠습니다. ^^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저도 운발이 좋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잘 읽었습니다.

  3. 심용정 2011.12.07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짧은 글이지만 여정이 꽉 차있네요. 그리고 읽을 수록 좋은 pd이전에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다음 드라마 아무 기대 안 하고 있을테니 어느 순간 갑자기 놀래켜주세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로 ~

  4. 카이 2016.01.21 14: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보는 게 인생의 낙인데요, 드라마 PD가 되면 제가 좋아하는 걸 잃어버리게 되는 걸까요?

    • 김민식pd 2016.01.23 06: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구,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도 드라마 피디로 일하는 게 재미있는데, 좋아하시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