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가 연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 각종 매체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을 찾아보고 읽을 책 목록을 늘리는 일이지요. 제가 독서일기에서 추천한 책들이 많이 보여서 흐뭇했어요. 특히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춘추전국 이야기>가 여러 리스트에 올라있네요. 역시 사람들의 눈썰미들은... '올해의 책' 중 눈에 띄는 책이 있어 찾아 읽었습니다.
힐빌리의 노래 (J.D. 밴스 / 김보람 / 흐름출판)
추천사의 면면도 화려합니다. 김민섭 작가가 쓴 추천의 글을 읽으니 책에 대한 기대치가 한층 높아집니다. 힐빌리란 미국 중서부 가난한 지역 출신의 백인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산골촌놈', 정도가 되겠군요. 책은 1부, 2부로 나뉘는데요,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이 1부의 내용입니다.
주인공이 학교를 다니며 가장 두려워하는 질문이 있어요. "형제가 어떻게 되니?"
주인공의 어머니는 고교 시절 첫 임신을 했는데요, 그 때문에 대학 진학을 못 합니다. 저자는 태어난 후, 생부와 헤어지고, 엄마가 새로운 연애와 결혼을 할 때마다 새로운 아버지들을 만납니다. 이부형제와 이복형제가 열 명이 넘어가는 상황이다보니 가족 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늘 난감한 거죠.
미국의 노동 계층 가정은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을 정도의 불안정을 경험한다. 남편감을 끝없이 바꿔가며 만나던 우리 엄마를 떠올려보라. 이런 일이 미국만큼 일어나는 나라는 없다.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이 어머니의 동반자를 세 명 이상 만날 확률이 0.5퍼센트다. 200명 중에 한 명 꼴인 셈이다. 미국은 8.2퍼센트라는 충격적 수치를 기록했으며, 이를 환산하면 12명 중에 한 명이다. 게다가 이 수치를 노동 계층으로 제한하면 그래프는 수직 상승한다.
(366쪽)
임신으로 고교를 중퇴한 엄마는, 가정이나 직장에서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실패합니다. 불안함에 시달리며 온갖 약물에 중독되기도 하고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폭주합니다. 알코올 중독이던 엄마가 간호사로 일하던 병원에서 환자들 약을 빼돌리기 시작해요. 마약성 진통제로 환각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결국 병원에서 해고되고 약물중독 치료센터 입원하는데요, 당시 저자의 나이가 열살 언저리에요. 고교생 누나와 둘이서 어른이 없는 집에서 시리얼로 연명하며 삽니다. 작가 자신도 고교에 진학해서는 술과 대마초를 즐깁니다. 성적은 낙제점 언저리를 맴돕니다. 대다수의 힐빌리들이 그러하듯, 결국 저자도 부모의 불행한 삶을 그대로 물려받을 것처럼 보입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학교 생활을 엉망으로 하는지, 그 원인을 찾는 회의 내내 공공 기관의 책임만 언급하는 부분은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선생님이 최근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방황하는 아이들의 목자가 돼주길 바라지 그런 애들 대부분이 늑대에게 길러진다는 현실을 툭 까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야."
(211쪽)
저자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간호사로 일하던 엄마가 찾아와 소변을 부탁합니다. 직장에서 불시에 약물 중독 검사를 하는데, 자신의 소변을 냈다가는 간호사 협회에서 면허가 취소될 판이라고 아들에게 대신 소변을 봐달라고 해요. 기가 막혀서 엄마에게 소리지르지요. "아들에게 소변검사를 대신 해달라니 당신은 정말 형편없는 엄마에요." 하지만 소변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아들도 몇주전 대마초를 피웠거든요. ㅠㅠ '욕하면서 닮는다'는 무서운 말이 있어요. 자식은 혐오하는 부모의 삶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부모가 힘들 때, 무엇을 하는지 그걸 보고 배우거든요.
책의 2부에서 주인공의 삶은 대반전을 맞이합니다. 어머니가 약물 중독 치료 센터에 입원하고 저자는 할머니집에서 살게 됩니다. 엄마와 살 때는 매번 새로운 의붓아버지를 만나고 새로운 의붓형제들을 만나며 불안한 삶의 연속인데, 외가집에서 살며 정서적 안정감을 찾습니다. 그래서 학습 의욕이 늘어나고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안 하던 공부도, 마음 먹고 하니 성적이 오릅니다. 자신의 손으로 삶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 해병대에 지원해 이라크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제대 후에는 제대 군인을 위한 학자금 대출을 받고 오하이오주립대에 진학하고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구보로 시작하던 군생활의 습관 덕에 성실하게 공부를 해 좋은 성적을 얻습니다. 나중엔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해요. 아이비리그 명문이지만, 최하층 계층의 빈곤 가정 지원 제도가 있어 큰 돈 들이지 않고 학업을 마칩니다.
불우한 환경에 놓여있던, 저자가 가난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구나 가능한 성공 스토리는 아니지요. 이 책은 '하면 된다'는 걸 강조하기보다, 가난이 왜 대물림되는지 그 구조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인가, 습관의 동물인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습관이라고 믿는데요.
가정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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