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1년에 책을 200권씩 읽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1980년대에는 요즘처럼 게임, 영화, TV, 만화가 다 들어있는 스마트폰이 없었어요. 도서관에 앉아 무협지며, 공포 소설이며, SF를 읽는 게 가장 재미난 놀이였지요. 틈만 나면 책을 읽는 버릇은 여전합니다. 요즘도 저는 1년에 200권 가까이 책을 읽는데요, 이제는 과학서나 인문 고전도 즐겨 읽습니다. 어쩌면 책벌레는 도서관이라는 던전을 무대로 활약하는 게임 캐릭터인지 몰라요. 공포물이나 추리물 같은 장르 소설을 즐겨 읽으며 책 읽는 근육을 기르고, ‘레벨업’을 한 다음에는 과학서나 고전 같은 어려운 미션에 도전하지요. 어려운 책 사이사이에 재미난 책도 끼워서 읽는 게 저의 다독 비결입니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을 읽었어요. 현대인의 일상을 공포의 소재로 다룬 단편들이 총출동합니다. 무박 자전거 국토 종주 중 만난 라이더, 함께 술을 마시면 매번 필름이 끊기는 술친구, 새벽 2시 40분만 되면 비명을 지르며 우는 아기. 일상의 한 단면을 쓱 잘라 그 속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환부를 드러내는 단편들, 오싹합니다. 어느 작가가 ‘공포는 도구도 에너지도 필요 없는 놀이 기구’라고 했는데요, 백번 공감합니다. 특히 공포 소설 단편집은 다양한 라이드로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 테마 파크지요.
공포를 기반으로 한 단편 소설들이 SF, 판타지, 추리 등 장르를 오가며 각자의 매력을 뽐냅니다. 단편 ‘증명된 사실’에는 소립자 연구를 전공한 물리학자가 산 속의 수상한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연구 과제는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랍니다. 영혼의 존재는 이미 ‘증명된 사실’이고요. 중요한 건 그 많은 영혼이 사후에 다 어디로 가는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그동안 천억 명의 사람들이 지구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면, 그 많은 사람들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소설의 마지막에는 과학적 추론에 바탕을 둔 SF적 반전이 나오는데요,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다 만나는 당연한 결말에 서늘한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브릿G에 게재된 2000여 편의 중단편소설 중 편집부에서 엄선한 10편의 화제작 앤솔러지’라는 책 소개에 끌렸어요. ‘브릿G’는 종이책으로 만나던 소설을 온라인 독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 온라인 ‘소설’ (‘소셜’이 아니라) 플랫폼이랍니다. 웹 소설에서 인기 장르가 단편 공포 소설이지요. 무수한 작품 중 웹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니 신뢰가 갑니다. 이런 시도, 참 좋네요. 요즘 시대,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휴대폰에서 텍스트를 읽습니다. 활자는 이야기 산업에서 여전히 중요한 기반입니다. 휴대폰 웹 소설 독자를 서점으로 이끄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책 읽는 쾌감을 젊은 독자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올해의 책’으로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을 추천합니다.
<시사IN>이 선정한 '올해의 책 2017 행복한 책꽂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더에게 필요한 것 (12) | 2018.01.23 |
---|---|
블로그로 분신술 (13) | 2018.01.22 |
행복한 인생을 위한 일상 기술 (23) | 2018.01.09 |
새해엔 내 몸을 더 사랑해주기로~ (9) | 2018.01.03 |
적당히 벌고 잘 살기 (6) | 2017.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