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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나는 누구의 '대리 인간'인가?

by 김민식pd 2017. 2. 6.

우리는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요. 재벌 2세로 태어나지 않는 한. 하지만 우리는 노동자라는 호칭을 부끄러워합니다. 노동을 하면서 노동을 부끄러워 합니다. '지금 내가 회사에서 일을 하지만, 이건 그냥 꿈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야. 언젠가 돈을 모으면 나도 카페를 차려서 사장이 될 거야. 고용주가 될 거야.' 회사에서 직원에 대한 처우가 나빠도 그냥 참습니다.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언젠가는 때려치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노동자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집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고 직장이라면,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서 그 일의 존엄성을 키우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더 주체적인 선택입니다. 노동자로서 긍지를 갖고 살아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중략)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책 173쪽)

우리 사회가 주입하는 그릇된 주체의식 중 하나는, 노동자이면서 노동자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노동조합 집행부가 되었을 때, 동료 피디가 그랬어요.

"형, 우리가 어떻게 노동자야?"

"그럼 우리가 자본가냐?"

노동을 존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최고의 예우는 상대를 주체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직장 동료를, 나의 가족을 존중하고, 그의 주체성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재미도, 공부하는 재미도 그래야 생깁니다. 타인이 나의 주체성을 존중하지 않는건 어쩔 수 없다고 칩시다. 적어도 내가 나의 주체성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거절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스스로를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해야 합니다.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공대를 나온 사람을 방송사에서 피디로 뽑아줄까?' '피디가 쓴 영어책을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 줄까?' 다른 사람의 결정은 알 수가 없으니 나는 내 마음을 살피는 게 우선입니다. 스스로 끌리는 일이 있으면 그냥 합니다. 그게 나를 나의 주체로 대접해주는 길입니다.

 

 

'대리사회'의 글 중 일부는 지인인 정혜승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만났어요.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해 책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후원을 신청했습니다. 그 결과, 책의 끝에 감히 이름 석자를 올리게 되었네요. 스토리펀딩은 창작자들이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고마운 창구인 것 같습니다.

 

ps.

'대리사회'의 끝머리에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이 잠깐 소개되는데요.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는 다 재미있어요.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 '긍정의 배신'. 한국 사회의 노동 르포가 궁금하다면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추천합니다. 

'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시대의창 펴냄)

문득 한승태 작가님의 근황도 궁금하네요. 차기작이 가장 기대되는 작가님중 한분인데 말입니다.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한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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