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요. 재벌 2세로 태어나지 않는 한. 하지만 우리는 노동자라는 호칭을 부끄러워합니다. 노동을 하면서 노동을 부끄러워 합니다. '지금 내가 회사에서 일을 하지만, 이건 그냥 꿈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야. 언젠가 돈을 모으면 나도 카페를 차려서 사장이 될 거야. 고용주가 될 거야.' 회사에서 직원에 대한 처우가 나빠도 그냥 참습니다.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언젠가는 때려치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노동자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집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고 직장이라면,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서 그 일의 존엄성을 키우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더 주체적인 선택입니다. 노동자로서 긍지를 갖고 살아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중략)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책 173쪽)

우리 사회가 주입하는 그릇된 주체의식 중 하나는, 노동자이면서 노동자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노동조합 집행부가 되었을 때, 동료 피디가 그랬어요.

"형, 우리가 어떻게 노동자야?"

"그럼 우리가 자본가냐?"

노동을 존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최고의 예우는 상대를 주체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직장 동료를, 나의 가족을 존중하고, 그의 주체성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재미도, 공부하는 재미도 그래야 생깁니다. 타인이 나의 주체성을 존중하지 않는건 어쩔 수 없다고 칩시다. 적어도 내가 나의 주체성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거절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스스로를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해야 합니다.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공대를 나온 사람을 방송사에서 피디로 뽑아줄까?' '피디가 쓴 영어책을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 줄까?' 다른 사람의 결정은 알 수가 없으니 나는 내 마음을 살피는 게 우선입니다. 스스로 끌리는 일이 있으면 그냥 합니다. 그게 나를 나의 주체로 대접해주는 길입니다.

 

 

'대리사회'의 글 중 일부는 지인인 정혜승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만났어요.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해 책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후원을 신청했습니다. 그 결과, 책의 끝에 감히 이름 석자를 올리게 되었네요. 스토리펀딩은 창작자들이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고마운 창구인 것 같습니다.

 

ps.

'대리사회'의 끝머리에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이 잠깐 소개되는데요.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는 다 재미있어요.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 '긍정의 배신'. 한국 사회의 노동 르포가 궁금하다면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추천합니다. 

'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시대의창 펴냄)

문득 한승태 작가님의 근황도 궁금하네요. 차기작이 가장 기대되는 작가님중 한분인데 말입니다.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한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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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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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첨밀밀88 2017.02.06 0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구절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2/1 ~ 11일 일정으로 일본에 와 있습니다.
    얼핏봐서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사람들 정말 보통이 아닌것 같습니다. 정말 놀란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질서 청결 예절 신뢰...

  2. 섭섭이 2017.02.06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내가 스스로를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해야 합니다. "

    PD님 글에서 많이 얘기해주시는 얘기이고, 저도 공감이 많이 가서 이렇게 살아가려고 노력중인데요.
    하고는 싶지만 망설이는 상황에서, 이 글귀를 되새기면 "그래, 하고 싶은 일은 그냥 해보는거야" 라는 자신감이 생겨서 이 글귀는 마음속에 항상 새기고 있어요. ^___^

    끝으로, 추천해주신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와 한승태작가님 책은 처음알게된 책인데 좋은 책들 같네요. 2월달 읽을 책 목록에 추가해서 꼭 읽어보겠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소개 좋은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3. 제주도심플주의자 2017.02.06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스스로를 거절해서는 안됩니다...그많은 시간동안 나를 거절한것이 스스로였다는데, 놀라움을 넘어 기괴함에 가까운 깨달음 이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참, 싸부님 블로그 처음 알게된게
    '영어회화100일..'을 검색해서 였거든요.
    저는 팟빵에서 회화듣는데, 요즘 팟빵에서 순위가 싸부님 책만큼 빵빵터집니다ㅎ
    문성현쌤 밥한번 사셔얄듯요^^

  4. 야무 2017.02.07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정말 동감해요!!

    '노동의 가치'를 부정한 결과에 대해 제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조금 수고롭고 힘들 수 있는 과정을 어떻게든 피해가려고 하는 태도가 몸에 배게 됩니다.
    꼭 일이 아니라도 무언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그 전에 수고하고 애쓰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자체가 힘들어지죠.

    2. 자본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일에 가치부여를 못해서 자존감이 낮아집니다.

    3. 1,2번은 결국 사용자들에게도 손해입니다. 자기 일에 가치부여가 되지 않은 일에 굳이 정성을 다하진 못할 것이고 수고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은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정도의 완성도밖에 남기지 못할 테니까요..


    외국에서 일을 하신 선배들이 한국기업과 외국기업(특히 독일 등 유럽 회사)의 가장 큰 차이로 꼽는 것도 그런 부분이었어요. 가장 허드렛일을 해도, 그 사람을 존중해주고, 일하는 과정에 생기는 불편함을 해결해주는 회사로부터 '너는 이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아 더 즐겁고 열심히 일하게 된다고 하더라구요. 우리나라 회사에선 어지간히 중요한 일을 해도 '너 아니라도 이 일 할 사람 많아!'라는 말을 듣는 거랑은 큰 차이가 있겠죠(그래놓고 뭘 충성심을 바라는지..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그런 회사들은 이런 말을 들어도 변함없이 일해주는 로봇(이나 로봇같은 사람)을 원하겠지만, 그렇게 로봇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나면, 물건 사줄 소비자들의 구매력도 사라지니까 기업도 소멸의 길을 걷는다는 얘긴데...뭐...로봇한테 왕노릇 실컷 하든지! 그런다고 로봇이 핸드폰을 쓰겄냐, 자동차를 쓰겄냐, 껌을 씹겄냐....--++ 로봇에게 생산을 맡길 거면 사람한텐 기본 소득을 주고 소비자를 왕으로 모시등가!!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있는 벱인데!!!! 같이 좀 살자 싶습니다.

    학교 수업에, 헌법하고 노동법은 한국사와 함께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줬으면 합니다~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이고, 소비자의 구매력은 노동자의 임금에서 나오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자신은 소비자라고만 교육(혹은 세뇌)받았네요..(여기서 손님은 왕이라는 미명하의 진상짓이 나오기도 하지요)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졌는데...너무 많은 것이 얽힌 문제라 깔끔하게 설명하기 어려웠어요...

    ps. 죄송하지만 전 언론사 직원들의 '노동자 아닌 줄 아는 태도'에 꽤나 유감있습니다. 대학 때 중앙일보 신입 기자가 중앙일보의 자기 블로그에 '기자가 되면 우아한 화이트 칼라일줄 알았더니 완전 블루 칼라'라고 썼길래 화이트 칼라나 블루 칼라나 그냥 다 일하는 사람인데 블루 칼라가 더 낮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물었다가 그녀의 친구인 다른 기자에게 실명을 안 밝혀서 비겁하단 댓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실명 밝히고 글 쓸랬는데 그새 가입자가 아니면 글 못 쓰게 바뀌어 있어 그것 때메 거기 가입하고 싶지는 않아 하고 싶은 얘기를 다하지 못한 기억이 있어서요^^~ 물론 모든 기자나 언론사 직원들이 다 그렇진 않다는 거 압니다. 그 신입기자도 아마 열심히 일하면서 바뀌었겠죠. 권X홍 같이 바뀌었을지 손석희 님처럼 바뀌었을진 모르겠지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