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여동생과 둘이서 서울에서 자취를 할 때 일입니다. 어느날 동생이, 자신의 학교 여자 선배가 지낼 곳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으니 몇달 간 같이 살아도 되냐고 묻더군요. 다른 이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는 동생의 심성을 알고 있으니 그러라고는 했지만, 한편으론 좀 그렇더요. '아, 그래도 나도 20대의 혈기왕성한 남자인데, 막 그래도 되나?'

대학 다닐 때, 동아리 여자 후배들이 저한테 와서 이런저런 고민도 털어놓고 연애 상담도 하고 그랬어요. 잘 생기고 멋있는 선배한테는 감히 근처에 가지도 못하면서 저처럼 부담없이 생긴 선배한테만 그러더군요. '아니, 말이야, 내가 생긴 게 빈약하다고 그렇게 막 편하게 대해도 되나?' 하여튼 뭐,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같이 지냈어요.

 

2012년 MBC 170일 파업을 할 때,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파업중이던 '골든브릿지 증권 노조'나 '세브란스 병원 노동조합' 등에서 MBC 파업의 의의에 대해 소개해달라고요. 그때 안산시 비정규직노동자 지원센터에서 안산노동대학을 담당하시는 분도 특강 요청을 하셨는데요. 메일 끝에 이렇게 쓰셨더라고요.

 

'저 기억하시나요? 수배중에 얹혀살던 미리 과 선배입니다.'

에엑?!

그럼 그때 그분이 수배중인 학생운동권이었던 거야? 제가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워요... 1980년대 남들 데모할 때, 저는 혼자 영어 소설 읽고, 나이트클럽가서 춤추고 그랬거든요. 학생 운동에 관심이 없어 집에서 몇 달을 같이 지낸 동생의 선배가 경찰에 쫓기던 운동권인줄도 몰랐어요. 동생은 저를 보호하려고 일부러 안 알렸대요. 수배자를 숨겨주는 것도 죄가 되는시대였는데, 그 사실을 모르면 죄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순진한 저는 그냥 드라마에 나오는 상황인줄 알았어요. 집이 갑자기 망해서, 식구들이 채무자를 피해 뿔뿔이 흩어져사는... 참 바보같지요. ^^

안산노동대학에서 20년만에 그 분을 만나고 느꼈어요. 그 시절, 세상을 바꾸겠다고 온갖 고초를 겪은 분들이, 아직도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구나... 이런 분들이 많은데, 386 운동권을 무슨 기득권 세력 취급하는 자들은 뭐냐... 군인이든, 정치인이든, 재벌이든, 항상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탄압한 자들이 대단한 애국자인양 폼잡고 다니는 세상... 씁쓸하면서도 그분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안산 노동대학 졸업식 사진. 저의 사부님이신 하종강 선생님의 모습도 보이네요. 이런 멋진 분들이 계셔서 희망이 있습니다.)

 

20년 전의 그 분이 얼마 전 또 메일을 주셨습니다.

'작은 도서관을 엽니다. 마을로 들어간 노동자공동체의 거점 공간이기도 합니다. 차마 버릴수 없었던, 단원고 한 학생의 책들이 한켠에 기증되어 있기도 하고, 형편 어려운 주민이 커플티 입고 늦은 결혼식을 하기도 하고, 주민영화제작동아리가 직접 만든 십분짜리 다큐를 상영하기도 하는 곳이랍니다. 이곳에 비치할 추천 도서 목록을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책벌레로 사는 이에게 도서관에 들어갈 책의 목록을 만들어달라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부탁이 또 있을까요? 작년 한 해 블로그에 올린 독서 리뷰를 다 뒤졌습니다. 2016년에 읽은 250권의 책 중 작은 도서관에 비치했으면 좋을 책 50권을 골랐습니다. 

내일 그 목록을 소개합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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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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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우수녀 2017.02.02 0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목록이 기다려집니다~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2. 히로 2017.02.02 0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 목록이 기다려지네요 ^^ 두구두구두구~

  3. 섭섭이 2017.02.02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인연이라는게 참 신기하네요.
    인연은 돌고 돈다 했는데 다시한번 만나는 한분, 한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겠어요.
    다시한번 PD님에게 감사드리고 싶네요.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주셔서, 또 소중한 인연이 되어주셔서요. ^^

    내일 책목록 공개가 기대됩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

  4. 날아라 펭귄 2017.02.02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과선배님들 덕분에 아직 살만한 세상입니다. 이런 고운 사연을 간직한 pd님을 이렇게 매일 뵙는 것도 영광입니다. (도서목록에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도 추가요)

  5. 김보아 2017.02.02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자만 알고 계실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누구나 볼 수 있게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짧은 글 한편에 진심 행복해집니다 ㅎㅎ 근무 중에 엄청 짜증나 있었는데 들어봐보길 잘했네요 ㅋㅋ

  6. 야무 2017.02.02 1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PD님의 끊기신공이란!! 한 수 배워갑니다. ㅎㅎㅎ

    내일 도서목록 기대되네요:)

  7. 최선희 2017.02.02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 제가 이야기에 등장하다니...
    무한영광입니다^^ (부끄부끄...)
    (그 당시 제 기억에도 오빠분이 날라리 pd라고 했던
    것 같아요.ㅋ)

    설날 아침, 교보문고에서 책 두권을 샀습니다.
    <영어책 한권 외워봤니?>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2017년, 새해 첫날을 함께 한 책입니다. ㅎㅎ

  8. 즐기자 2017.02.02 1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분들이 계셔서 아직 살만한 세상인것 같습니다.
    내일 도서목록 기대하겠습니다*_*

  9. Grace 2017.02.02 17: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책이 나올지 너무 궁금합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10. 첨밀밀88 2017.02.02 17: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라리PD요 ㅋㅋㅋ

    비치할 추천 도서 목록

    아직 비치가 안된거면 있는 사람이 기증할 수 있게 열어주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택배 보낼곳 주소만 공지하시면

    아무나 보내기 ㅋㅋ

  11. 2017.02.02 1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2. 하늘은혜 2017.02.04 0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godsetmefree.tistory.com/1035 혹시 이 블로그를 통해 저를 찾아오셨을 분들께...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 블로그 주소가 바뀌었습니다. 흑.. 컴맹의 비애라고나 할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론 이리로 찾아주셔요~ 감사합니다.

  13. 하우투 2017.04.04 0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곳까지 오게 됐어요
    강한 이끌림 으로요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