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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20년만에 날아온 편지

by 김민식pd 2017. 2. 2.

90년대 여동생과 둘이서 서울에서 자취를 할 때 일입니다. 어느날 동생이, 자신의 학교 여자 선배가 지낼 곳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으니 몇달 간 같이 살아도 되냐고 묻더군요. 다른 이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는 동생의 심성을 알고 있으니 그러라고는 했지만, 한편으론 좀 그렇더요. '아, 그래도 나도 20대의 혈기왕성한 남자인데, 막 그래도 되나?'

대학 다닐 때, 동아리 여자 후배들이 저한테 와서 이런저런 고민도 털어놓고 연애 상담도 하고 그랬어요. 잘 생기고 멋있는 선배한테는 감히 근처에 가지도 못하면서 저처럼 부담없이 생긴 선배한테만 그러더군요. '아니, 말이야, 내가 생긴 게 빈약하다고 그렇게 막 편하게 대해도 되나?' 하여튼 뭐,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같이 지냈어요.

 

2012년 MBC 170일 파업을 할 때,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파업중이던 '골든브릿지 증권 노조'나 '세브란스 병원 노동조합' 등에서 MBC 파업의 의의에 대해 소개해달라고요. 그때 안산시 비정규직노동자 지원센터에서 안산노동대학을 담당하시는 분도 특강 요청을 하셨는데요. 메일 끝에 이렇게 쓰셨더라고요.

 

'저 기억하시나요? 수배중에 얹혀살던 미리 과 선배입니다.'

에엑?!

그럼 그때 그분이 수배중인 학생운동권이었던 거야? 제가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워요... 1980년대 남들 데모할 때, 저는 혼자 영어 소설 읽고, 나이트클럽가서 춤추고 그랬거든요. 학생 운동에 관심이 없어 집에서 몇 달을 같이 지낸 동생의 선배가 경찰에 쫓기던 운동권인줄도 몰랐어요. 동생은 저를 보호하려고 일부러 안 알렸대요. 수배자를 숨겨주는 것도 죄가 되는시대였는데, 그 사실을 모르면 죄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순진한 저는 그냥 드라마에 나오는 상황인줄 알았어요. 집이 갑자기 망해서, 식구들이 채무자를 피해 뿔뿔이 흩어져사는... 참 바보같지요. ^^

안산노동대학에서 20년만에 그 분을 만나고 느꼈어요. 그 시절, 세상을 바꾸겠다고 온갖 고초를 겪은 분들이, 아직도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구나... 이런 분들이 많은데, 386 운동권을 무슨 기득권 세력 취급하는 자들은 뭐냐... 군인이든, 정치인이든, 재벌이든, 항상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탄압한 자들이 대단한 애국자인양 폼잡고 다니는 세상... 씁쓸하면서도 그분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안산 노동대학 졸업식 사진. 저의 사부님이신 하종강 선생님의 모습도 보이네요. 이런 멋진 분들이 계셔서 희망이 있습니다.)

 

20년 전의 그 분이 얼마 전 또 메일을 주셨습니다.

'작은 도서관을 엽니다. 마을로 들어간 노동자공동체의 거점 공간이기도 합니다. 차마 버릴수 없었던, 단원고 한 학생의 책들이 한켠에 기증되어 있기도 하고, 형편 어려운 주민이 커플티 입고 늦은 결혼식을 하기도 하고, 주민영화제작동아리가 직접 만든 십분짜리 다큐를 상영하기도 하는 곳이랍니다. 이곳에 비치할 추천 도서 목록을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책벌레로 사는 이에게 도서관에 들어갈 책의 목록을 만들어달라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부탁이 또 있을까요? 작년 한 해 블로그에 올린 독서 리뷰를 다 뒤졌습니다. 2016년에 읽은 250권의 책 중 작은 도서관에 비치했으면 좋을 책 50권을 골랐습니다. 

내일 그 목록을 소개합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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