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전에 블로그에 배명훈의 '타워'에 대한 글을 올린 적도 있지만, 나는 배명훈 작가의 팬이다. SF 마니아로써 한때 SF 소설 번역가를 꿈꾸던 내게 이런 멋진 토종 SF 작가가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의 신작이 나올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영접한다.
내가 배명훈을 좋아하는 이유는, 상상력의 규모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SF를 창작하는 작가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그가 '타워'에서 창조한 수직 도시라는 세계도 놀라웠지만, '신의 궤도'에서 보여준 인류의 외계 행성 이주의 역사를 써 나가는 스케일 역시 압도적이다.
내가 배명훈을 좋아하는 두번째 이유는, 이야기의 흐름이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한편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듯한 시각적 짜릿함이 있다. 소설을 읽으며 시각적 흥분을 느끼기는 쉽지 않은데 '신의 궤도'에서 보여주는 공중전이나 '은닉'에 나오는 초능력을 갖게 된 첩보원들의 격투씬을 읽노라면 눈 앞의 대화면에서 생생한 액션이 펼쳐지듯 짜릿하다. (그래서 감독들이 배명훈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나 보다. '은닉'의 추천사는 박찬욱 감독이 썼다.)
내가 배명훈을 좋아하는 세번째 이유는, 세상을 보는 탁월한 식견 때문이다. 전혀 이질적인 세계를 창조하지만 그 세계를 움직이는 인간 본성은 어디나 똑같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세상사에 대한 깨달음을 문득 얻게 된다.
'은닉'을 읽고 무릎을 친 대목은 깃발의 의미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중세시대 기사들의 기병전에서 모든 기사는 창을 앞으로 향하고 돌진한다. 양측의 병사들이 중간에서 '꽝'하고 격돌할 때까지 그 누구도 창을 내리지 않는다. 상대가 겨눈 창에 찔리기 전에 앞으로 내민 창으로 상대를 물리치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편이다.
이런 기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수의 역할이다. 기수는 깃발을 자신의 창에 다는데 이때 그는 돌진할 때 창을 앞으로 겨누지 않는다. 모든 기사는 그 깃발의 신호에 따라 앞으로 돌격한다. 어느 한 편의 깃발이 꺾여 하나의 깃발이 남을 때까지 양편의 기사는 계속 대형을 갖춘 후 돌진하여 부딪히며 싸운다. 기수는 깃발을 든 자로 깃발을 꼿꼿이 세워 높이 나부끼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기수란 자신을 위험에 노출하면서도 깃발을 높이 치켜드는 사람이다. 누군가 깃발을 들고 자신을 위험에 노출하면서까지 싸운다면, 깃발에 대한 예의는 그 깃발이 내려질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
항상 내게 깨달음을 주는 배명훈 작가에게 감사한다. 작년에 읽은 '타워' 역시 부끄러움과 깨달음을 줬는데... 역시 훌륭한 작가는 팬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다른 블로그에서 퍼온 사진인데, 사진에 출처가 있으니까 양해해주시겠지? ^^)
작년에 올린 글~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 자신의 멀티플라이어가 되자 (6) | 2012.08.30 |
---|---|
3차산업혁명과 강남소녀 (1) | 2012.08.28 |
스승을 찾아다니는 삶... (4) | 2012.07.20 |
당신의 여름을 시원하게 해 줄 '스노우맨' (4) | 2012.07.16 |
외모로 놀리지 맙시다 (8) | 2012.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