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재테크를 하며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할 때, 나는 처(妻)테크를 하며 아내의 커리어에 투자한다. 컨설턴트로 일하던 아내를 미국에 MBA 유학 보낸다고 MBC 퇴직금까지 중간정산 받았다. 2년간 꽤 많은 비용을 들여 유학을 마친 아내에게 어느 날 물었다.
“그 비싸다는 경영 컨설팅, 나도 한번 받아보자. 그래, 당신이 보기에 PD로서 나의 커리어 플랜은 뭐야?”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아내가 대답했다.
“당신이 가야할 길은 ‘이플러스’ 같은 피디가 되는 거지.”
“응? 그게 무슨 얘기야?”
“MBC는 엄밀히 말하면 생산 공장이 아니라 유통 회사야. 다양한 피디라는 상품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지. 그 중에는 화려하고 잘나가는 대박 상품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그런 피디는 아니잖아? 당신의 연출을 보면 스케일이 약해. 대작이나 사극을 연출하기엔 힘들지. 디테일도 부족해서 스릴러나 액션을 찍지는 못할 거야. 일일 시트콤을 오래 연출한 덕에 빠르고 싸게 찍는 건 잘하지. 당신은 MBC에서 가장 잘 나가는 피디가 아니라 가장 싸고 빠르게 찍는 피디로 마켓 포지셔닝을 해야 돼. ‘이마트’에 가면 ‘이플러스’라고 있지? PB (Private Brand) 상품이라고 제품 개발비나 마케팅비를 안 들이고 오로지 저가로 승부하는데, 알고 보면 이마트의 최고 효자 상품이지. 손해 볼 일이 없거든. 그러니까 당신은 ‘이플러스’ 같은 피디가 되어 오래 오래 MBC에서 살아남는 거야.”
비싼 학비 들여 와튼 스쿨까지 보내놓았더니 이런 걸 컨설팅이라고 하고 있다. 아내의 이런 조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님께서는 이렇게 깜찍한 외모를 하시고는, 남편에게 독설 조언을 날려대신다. ㅋㅋㅋ)
아내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피디로서 나의 경쟁력 중 하나는 외모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밤샘 촬영에 지친 스태프들에게 기운을 불어넣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모니터의 남자 배우 바스트 샷을 바라보다 이렇게 외친다.
“사내라면 저 정도는 생겨줘야 하는데 말이야. 우리 부모님은 도대체 뭘 하신 거냐고!”
누구나 인정하는 못난 외모 탓에 자학 개그는 언제나 빵빵 터진다. 작년에 MBC 파업을 하며 강남역에 나가 홍보 전단지를 돌릴 때는 한 교양제작국 후배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
“형은 그냥 뒤에서 좀 쉬세요. 형이 피켓 들고 서있으면 동남아 이주 노동자가 피케팅하는 걸로 오해해요. ‘사장님, 나빠요. 때리지 마세요.’ 이거죠.”
후배의 이런 농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오랜 세월 외모로 인해 겪은 수모 덕에 내가 만드는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무조건 가난한 외모를 가진 주인공이 연애의 ‘갑’이다. 연출 데뷔작인 ‘뉴논스톱’에서 또순이 박경림을 향한 짝사랑에 꽃미남 조인성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구리구리 양동근 때문에 어리바리 장나라의 애간장이 녹는다. 예쁘고 잘난 것들을 향한 복수심이 내 연출의 힘이다.
자신의 약점이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PD로 사는 것에 감사한다. 연출자 각자가 가진 개성이 콘텐츠 제작의 다원화로 이어져 결국 방송 산업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 할 것이라는 점에서 PD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한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다. 지난 주 금요일, 법원의 부당인사 효력정지 처분에 따라 17명의 MBC PD들이 제작 현장에 복귀했다. 사극 세트장 관리나 사회공헌실, 지방 총국 근무 등의 다양한 경험을 쌓아오던 PD들이 이제 제작 현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 많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날들이지만 나는 믿는다. 창작자에게는 시련이 영감의 원천이고, 그렇기에 언젠가는 이 시기를 웃음으로 추억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PD저널 칼럼, '김민식 PD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3번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