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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 피디에게 오락을 허하라

by 김민식pd 2013. 5. 22.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오락실 주인이 되어 매일 매일 전자오락만 하고 사는 것이었다. ‘라이덴이라는 비행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에 빠져있을 때는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한번 동전을 넣으면 우주 끝까지 갔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와서 새로 시작할 때까지 30분 가까이 버티곤 했다. 그랬더니 100원을 넣으면 주인이 와서 200원을 손에 쥐어주며 다른 가게에 가서 하라고 부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오락실 가서 돈 벌었다고 자랑을 했더니 어머니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셨다.

 

오락실 주인이 오락을 즐기기는커녕, 오락 잘 하는 아이 때문에 안달복달하는 직업이란 걸 깨달은 후, 오락실을 차리겠다는 꿈을 접었다. 놀고먹는 또 다른 꿈의 직업이 오락 프로그램 피디였다. 입사하고 처음 맡은 프로그램이 인기가요 베스트 50’이라는 생방송 음악 프로그램 조연출이었는데, 지금 조연출들과 비교해보니 놀고먹는 한량이었다. 생방송 음악 프로에서 조연출이 할 일은 별로 없고, 단지 누가 무대에서 바지를 벗지나 않는지 감시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

 

 

(뉴논스톱 연출할 때는 종종 출연하기도 했다. 어떤 분이 화면 캡처해서 보내준 장면. 나이트크럽 엑스트라로 나왔을 때. ^^)

 

주된 업무가 가요 순위 소개 편집 밖에 없어 일은 수월했는데, 그럼에도 일주일에 하루는 밤을 새야 했다. VJ와 함께 크로마키 촬영을 한 후, 배경이 될 뮤직 비디오랑 싱크를 맞춰 편집을 하고 헨리라는 특수영상제작 프로그램에 올려 화면 합성을 하는데, 밤을 샌 이유는 1997년 당시 컴퓨터의 그래픽 처리 속도가 워낙 느려 한번 프로그램을 돌리면 기다리는 시간이 두어 시간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 특수영상을 담당하던 선배가 그랬다. “민식 씨는 참 운이 없네. 몇 년 내로 더 좋은 컴퓨터가 도입되면 컴퓨터 처리 속도가 빨라져서 후배들은 밤샐 일이 없을 텐데 말이야.” 과연?

 

오락실 주인이 오락을 즐기지 못하듯이, 요즘 오락 프로그램 조연출들도 오락은 즐기지 못한다. 방송사 전체 직원 중 가장 혹독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는 게 바로 예능 조연출인데, 그 이유는 바로 기술의 발달 탓이다. 스튜디오에서 녹화하던 것이 카메라 장비의 경량화 덕에 야외 녹화로 대치되었고, ENG 카메라 한 대로 찍던 것이 넌리니어 편집 방식이 도입되면서 카메라 10대를 동시에 돌리게 되었다. 편집에 드는 물리적 시간만 해도 예전과 비교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었다. 게다가 출연자 소개용으로만 쓰이던 자막이 이제는 만화 대사처럼 화면을 도배하기에 이르렀고, CG의 발달로 요즘 토크쇼는 실사인지 애니메이션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화려한 그래픽을 자랑한다. 이러니 밤을 안 새고 버틸 재주가 있나?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노동량이 줄어드는 게 모든 산업의 공통점인데, 방송에서만큼은 기술이 발달할수록 노동 강도가 반대로 증가하고 있으니, 예능 피디들은 기술의 발달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하지현 씨는 예능력이라는 책을 통해 예능에서 발견한 오늘을 즐기는 마음의 힘을 예찬한다. 정신과 의사인 그가 보기에 요즘 예능 프로그램은 온 국민의 마음 주치의다. 시청자들은 예능을 통해 지친 마음을 치유 받고, 자신을 지키는 마음의 힘을 키우고, 사람과 어울리는 능력을 키운다. ‘예능력은 예능 프로그램 예찬론에 있어 최고의 책이다. 예능 피디들이 이 책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

 

전국의 시청자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마음의 휴식을 얻는데, 정작 그 예능을 만드는 사람들은 살인적인 업무 환경 때문에 쉴 틈이 없다는 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혹독한 노동 현장에 대한 사회 고발 프로그램도 많던데, 교양 피디들은 예능 조연출들의 업무 환경도 한번 살펴봐주시기 바란다. 전 국민에게 웃음을 주는 이들이 정작 웃음을 잃어가는 현실,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부디, 오락 피디에게 오락을 허해주시길.

 

(PD 저널 연재 칼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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