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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한 한류

by 김민식pd 2013. 3. 20.

싱가포르에서 해외 근무 중인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기 싱가포르에도 한국 드라마가 정말 인기있나봐. 나랑 같이 일하는 중국계 여직원은 심지어 당신이 만든 드라마를 다 봤더라고. 당신 드라마는 한국에서도 별로 인기가 없는데 말이야. 정말 신기하지 않아? 당신은 외모답게 한국보다 동남아에서 더 통하나 봐.”

아내의 이런 조크,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 드라마가 동남아에서 워낙 인기를 끌다보니 내가 만든 드라마도 묻어가나 보다.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그렇게 잘 나가는 이유가 뭘까? 문득 10년 전 스위스에서 만난 영국 프로듀서가 생각났다. 연출 데뷔작인 청춘 시트콤 뉴논스톱이 스위스 골든로즈 TV 페스티벌 본선에 진출했을 때, 어느 BBC 피디가 뉴논스톱이 뭐냐고 묻기에 “It‘s a daily sitcom. 일일 시트콤이야.” 했더니 그 친구 눈이 똥그래졌다. “시트콤을 매일 방송한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 “, 한국에서는 다들 그렇게 해.” “그럼 네가 하는 일은 뭐야? 대본 작업? 야외 촬영? 아니면 스튜디오 녹화?” “그 셋을 다 하는데?” “뭐라고? 그럼 너희도 미국처럼 에피소드별로 연출이 따로 붙니?” “아니, 내가 다 연출하는데?” 일 년에 30분짜리 시트콤 200편을 만든다는 얘기에 그 친구는 혀를 내둘렀는데, 그의 반응이 나의 높은 업무 효율에 대한 경탄이었는지, 착취당하는 후진국 노동자에 대한 연민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웃 나라인 일본만 해도 인구가 12천명이 넘는다. 경제 규모나 인구로 볼 때, 자국어 시장만으로 충분히 경제성이 보장되기에 일주일에 드라마 한 편 만들어도 장사가 된다. 미국은 영어로 방송을 만들기에 전 세계 영어 사용 국가에 수출할 수 있다. 우리는 인구가 5천만도 안되고 그마나 한국어를 쓰는 외국 시장이 하나 있긴 한데 (북한) 수출이 안 된다. 이런 시장에서 수지를 맞추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제작 단가를 낮추는 일이다. 그래서 남들 일주일에 한 편 만드는 시간에 우리는 다섯 편을 만든다. 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분량을 제작하다보니 자극적인 대본 전개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첫 장면부터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복수나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같은 강한 설정이 나와야하고, 매회 끝에서는 다음 회를 보게 만드는 중독성 강한 엔딩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 드라마가 해외 시장에서 성공한 이유는 이처럼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내수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작진 모두가 몸부림친 결과이다. 작가는 온라인 반응을 보고 쪽대본을 쓰고, PD는 날 밤 새며 드라마를 찍는다. 후진적인 제작 시스템 덕에 콘텐츠의 선진화가 이루어졌다니, 이거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그래서 이제는 세계 방송사상 유례없는 도전에 나선다. 현대물도 아닌 시대극, 그것도 메디컬 드라마를 일일 연속극으로 만드는 것이다. ‘과연 저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걸까?’ MBC 새 사극 구암 허준은 드라마를 예술에서 한 차원 끌어올려 마술의 경지로 올릴 속셈인가 보다.

 

뉴스데스크를 8시로 옮기고 나서 경쟁력 회복을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도 시청률이 고전하니까 결국 일일 사극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내민 모양이다. 예능의 경우, 시청률이 안 나오면 MC를 바꾸는데, 뉴스의 경우는 좀 다른가보다. 하긴 워낙 국민들로부터 호감도가 높은 앵커들인지라 출연자 교체를 카드로 꺼낼 수는 없으니 일일 사극이라는 초강수를 두는 모양인데, 정말 고민이다. 일일 사극 허준이 성공한다면, 앞으로 시간이 없어 못 찍는다고 엄살 피우기도 힘들게 생겼다. “메디컬 사극도 일일 연속극으로 만드는 데 무슨 소리야!” ‘구암 허준이 성공하면 진짜 고민될 것 같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PD 저널 연재 칼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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