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프레시안 북스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사놓고 책꽂이에 그대로 꽂혀 있는 책에 대하여' 리뷰를 써달라는...
와우, 이거 참 재미난 기획이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
이 글은 프레시안 북스에 기고했던 그 원고다.
책을 많이 사는 편인데, 읽지 않고 넘기는 일이 없도록, 새 책은 책상 한 편에 쌓아놓고 읽는다. 다 읽기 전에는 책꽂이에 꽂지 않아야 빠뜨리지 않고 다 읽을 수 있다. 물론 가끔 책을 읽다가 돈보다 시간이 더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완독을 포기하고 서가로 귀양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한 장도 읽지 않고 책꽂이로 직행하는 경우는 없다. 그래도 가끔 한 장도 들추지 못해 몇 달째 책상 구석에 처박혀있는 책도 생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그런 경우다.
이 책만큼은 책을 읽지 않은 변명보다 내 손에 들어온 계기에 대해 먼저 변명을 해야겠다. 나는 MBC에서 드라마 피디로 일하고 있다. 드라마 피디에게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드라마 원작을 찾기 위해 만화와 소설을 읽는 일이다.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다가도 멀리서 국장님이 보이면 얼른 만화책을 펼쳐놓고 읽는 척한다. 비상시를 대비해 항상 책상에는 만화책과 소설이 쌓여있다. 정말 아름다운 사무실 분위기 아닌가? 덕후에게 최고의 직업이 드라마 피디다.
매년 여름에는 평소 원작 검토를 위해 관심 있는 소설을 회사에서 대신 사주는 특별 이벤트도 한다. 그런데 올해의 책 구매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신청 마감을 놓쳤다. MBC 노조 부위원장인 나는 올 봄에 ‘MBC 프리덤’이라는 화제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고, 그 공로를 회사로부터 인정받아 정직 6개월의 징계에 처해졌다. 매일 로비에 앉아 삭발하고 단식하며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농성을 계속하는데 그러다보니 소설 구매 이벤트를 잊고 지나쳤다. 그런데 기획실에서 연락이 와서 신청 마감은 지났지만 당일 중으로 목록을 보내면 구매해주겠다 해서 쾌재를 불렀다. “럴쑤 럴쑤 이럴쑤! 와라와라왕대박!” (나의 연출 데뷔작 ‘뉴논스톱’에서 양동근이 애용하던 대사다.)
1시간 내로 읽고 싶은 소설 열권을 써내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평소 찜해둔 책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채워나갔는데, 마지막 1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를 검색했다. 그랬더니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작가의 듣도 보도 못한 소설이 2위에 올라있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평소 다독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 책은 많다. 별 생각 없이 목록에 올려 기획 담당자에게 보냈다.
그러고 며칠 후, 신문 기사를 통해 ‘그레이’의 정체를 알았다. ‘여성들을 위한 소프트 포르노그라피. 적나라한 SM 플레이의 향연. 너무 야해서 전자책 판매로 붐을 일으킨 책.’ 허걱! 이런 책이었어? 순간 기획실 여직원의 독백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뭐야, 김민식 감독님, 평소에는 점잖은 척 하더니 이런 취향이었어? 어떻게 이렇게 야한 책을 사달라고 하는 거지? 이걸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거야, 지금? 몰래 사서 혼자 보면 될 걸 왜 회사에 주문을 넣어?’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책 열권이 왔는데, 내가 정작 읽고 싶었던 책이 한 권 빠져있었다. ‘어떻게 된거지?’ 하고 보니 그레이가 2권짜리 세트여서 신청한 수가 넘치니까 여직원이 나의 변태적 성향을 배려해 점잖은 책을 한 권 빼고 대신 그레이의 세트를 채워준 것이다. 비닐에 쌓여 배송된 ‘그레이’의 모습은 마치, ‘애들은 가라.’ 하고 외치는 듯 더더욱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 야동도 멀리하고 사는 성인군자라는 건 아니다. 이미 중학교 때 ‘고르고13’같은 19금 일본 만화를 섭렵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 사진집 산타페’를 친구들과 공동구매해서 낱장으로 찢어서 소장했던 몸이다. 대중을 상대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드라마 피디라면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어야한다고 생각해서 다양한 소설을 읽는데 굳이 하드코어 로맨스라고 기피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책에 손이 안 가는 이유?
올 상반기 170일간 파업을 한 MBC 조합원들은 상식과 법절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여야 개원합의를 믿고 업무에 복귀했는데, 그 이후 몇 달간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레이가 소설 속에서 얼마나 가학적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에서의 김재철 사장을 당하지는 못할 것이다. 기자와 스포츠 피디를 출퇴근만 하루 4시간 넘게 걸리는 지방 드라마 세트장으로 발령 내고, 한국 프로듀서 연합회 회장을 교육발령 내어 샌드위치 만들기를 배우게 만든다. 피디수첩의 작가들은 전원 해고하여 몇 달 째 피디수첩을 결방시키고, MBC 뉴스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지경으로 망쳐놓아 온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게 만든다. 그 어떤 하드코어 SM 플레이도 김재철의 막장 플레이는 절대 못 따라간다.
‘그레이’를 아직 못 읽고 있는 이유는 김봉석 평론가가 쓴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탓이다. 책이 워낙 재밌기도 하지만, 김봉석 평론가가 맛깔나게 소개한 38권의 하드보일드 소설을 찾아 읽느라 다른 책에는 잘 손이 가지 않는다. 책에서 김봉석 평론가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드보일드는 살아남은 자, 아니 살아가야만 하는 자의 서사다. 아무것도 줄 수 없다 해도, 미로를 헤매는 즐거움은 존재할 수 있다. 이 끝없는 미로의 출구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만은 간절하게 남아 있기에. 그게 하드보일드의 비극적인 세계관이다. 알 수는 없지만, 믿을 수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재벌과의 SM플레이를 상상하기보다 나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으며 희망을 꿈꾼다. 공영방송 MBC의 정상화, 언제 올지 모르지만 나는 기다린다. 그 날이 오기까지,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하드코어 로맨스 대신 하드보일드 소설을.
‘아무리 늦게 와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필요한 것은 무한한 인내심.
초조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기운을 빼지도 말고.
그러다가 갑자기 행동으로 돌입하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기술이다.’
리 차일드의 ‘추적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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