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름 5주 동안 대학생인 큰 딸과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어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 스위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를 돌아 마지막에는 네덜란드로 갔는데요. 암스테르담 여행기를 아직 안 올렸더라고요. 그날의 일기를 공유합니다.
8월 24일. 로테르담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버스로 이동합니다. 유레일 패스를 샀지만, 국가간 이동이나 장거리 이동할 때 기차를 타고요. 가까운 거리는 버스로 이동합니다. 플릭스 버스를 예약했는데, 10유로. 쌉니다!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됩니다.
버스는 깨끗하고 무료 와이파이도 됩니다.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어요. 이번 유럽 여행에서 꼭 가고 싶어서 미리 예약해둔 반 고흐 미술관으로 갑니다.
저는 반 고흐를 정말 좋아합니다.<외로움 수업>이란 제 책에서도 썼지만, 고흐는 사람들에게 오해받은 외로운 영혼이었어요. 평생 2000장의 그림을 그리고 겨우 한 장만 팔렸던 화가. 고흐의 영혼이 있다면 이곳 반 고흐 미술관에 머물 것 같아요. 자신의 그림들이 사방 벽을 가득채우고,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전세계에서 찾아온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이곳.
얼마전에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에 갔는데요. 음, 거기에 나오는 인물화의 주인공은 대개 모델들입니다. 당시 비엔나의 화가들은 직업 모델을 써서 그림을 그렸고, 그 모델들과 연애도 하고 그랬어요. 고흐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요. 직업 모델을 구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주변에서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림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그림이 <감자 먹는 사람들>.
반 고흐 살아생전에는 혹독한 평가를 받은 그림이지요. 유럽 미술관에 가보면 옛날 그림에는 다 귀족이나 여신들이 나와요. 아름다운 인물화나 화려한 풍경화를 보다가 가난한 이들이 둘러앉아 감자 먹는 모습을 보면 무척 낯설겠지요. 뭘 이런 걸 다 그림으로 그리나, 했을 거예요. 고흐에게는 노동화가라는 별명도 있어요. 왜냐? 그는 노동의 존엄성을 믿었고요, 매일 노동하듯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해바라기처럼 유명한 그림도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림도 많아요. 고흐가 살아생전 그린 초안만 1100장 가까이 되는데요. 그중 절반을 이곳에서 소장하고 있답니다.
고흐가 파리에서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화풍을 고민한 시절도 있어요. 많은 자극을 받았으나 너무 많은 이들과의 교류는 고흐를 지치게 만듭니다. 네, 그럴 수 있어요. 외로운 영혼에게 너무 잦은 만남은 피로를 안겨주거든요. 그래서 시골에 가서 칩거하며 자신이 만나는 주위 사람들, 우체부나 의사를 모델로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이 머물던 시골 마을에 고갱을 초대합니다. 이곳 노란집은 고흐가 예술인 공동체를 꿈꾼 공간인데요.
고갱의 방을 화려하게 꾸며주려고 벽에 걸 <해바라기>까지 그렸어요. 하지만 둘의 사이는 끝내 틀어지고요. (원래 예술가들끼리는 친해지기 어려워요. 드라마 피디들이 친하게 지내는 거 별로 못봤어요. 다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 그런데요, 관계와 고독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사람은 방황하며 성장합니다.
전시 마지막 대목에 나란히 서있는 빈센트와 테오의 묘비 사진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납니다. 수천장의 그림을 그렸지만 끝내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은 형. 말년에 정신병을 앓으며 병원과 요양지를 오가며 외롭게 살다간 형. 그런 형에게 매월 생활비를 보내고 병원비를 대주며 돌본 동생. 형이 세상을 등지자 1년 뒤 동생도 마치 따라가듯 세상을 뜹니다. 어찌보면 형제의 비극으로 잊혀질 수 있는데요. 반전이 있지요.
동생에게는 부인이 있었어요. 남편은 가고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해요. 화상으로 그림을 팔던 남편의 소장목록을 보니 시아주버님이 남긴 수천장의 그림이 있어요. 그 누구도 사려고 하지 않는. 그림을 팔기 위해서는 화가의 이름부터 알려야겠다고 생각해요. 마침 남편과 시아주버니가 주고 받은 수백통의 편지가 있어요. 그 편지를 모아 책을 냅니다. 세간에 한 불행한 예술가의 삶이 알려지고, 이제 순회 전시회를 다닙니다. 즉, 죽은 반고흐를 살리고 남편의 콜렉션에 의미를 부여한 건 살아남은 부인이었어요. 기회는 산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제가요, 고등학교 때 정말 우울했어요. 집에서도 힘들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으로 힘들고, 그 와중에 성적은 오르지도 않고. 삶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한편으로 생각하니 내가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나를 괴롭히는 이들이 벌을 받을까? 아니요. 나를 괴롭힌 아이들은 오히려 이렇게 생각할걸요? '아이구, 저 찌질한 자식, 결국 저렇게 찌질하게 가네.' 남들이 나를 괴롭힐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내가 나를 죽일 수는 없어요. 그건 내가 자신에게 가장 못할 짓을 하는 거니까.
Dum spiro, spero. '살아 숨쉬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라틴어 격언입니다. 살아야해요.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어요, 그럼 오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걸 생각해봐야 해요.
힘들수록 저는 글을 씁니다. 아무리 인생이 초라해도 기록은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가난한 부인이 남편이 남긴 그림을 팔려고 해도, 스토리가 없으면 그림은 팔리지 않아요. 다행히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동생에게 편지로 남겼어요. 물론 때로는 동생에게 생활비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즉 돈을 청하려고 쓴 편지도 있지만, 그렇게 편지를 쓸 때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림이 어떻게 더 나아지고 있는지, 세세하게 적었어요. 그 편지글이 묶여 나온 책이 <반 고흐, 영혼의 편지>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 중 하나입니다. 세상일은 절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는 책이고요. 겸손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세이지요. 그렇게 열심히 쓰고 그렸기에 지금 우리는 반 고흐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겁니다.
오디오가이드를 들으며 꼭 설명과 함께 그림을 감상해보세요.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요.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편지에서 일일이 설명을 했기에 마치 화가의 육성 설명을 듣는 것 같아요.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공원에서 체스를 두고 있네요.
아름다운 암스테르담의 거리를 걷습니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요, 갑자기 삶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릅니다. 살고 싶어요. 더 뜨겁게.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참 걷다보니 배가 고프네요.
비어 파브리크, 말 그대로 맥주 공장. 유명한 가게라 해서 오후 5시 반에 왔어요.
너무 이른 시간인가? 사람이 없네요. 당시 제가 새로 만든 습관 하나가 있어요. 오후 6시 전에 저녁 식사를 마치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쓰신 책을 보니 마지막 식사와 수면 시간 사이 이상적인 간격은 4시간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항상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 잠에서 깹니다. MBC 피디로 일하며 새벽에 일어나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던 시절에 생긴 습관입니다. 밤 12시가 넘어서 자도 일어나는 시간은 일정해요. 즉 4시간밖에 못자는 거죠. 그래서 저는 요즘 저녁 9시면 무조건 잠자리에 듭니다. 그래야 7~8시간을 푹 잘 수 있거든요. 다만 식사를 한 후, 충분히 소화시킨 후 잠자리에 들어야 숙면을 취합니다.
유럽배낭여행 30주년 기념 여행의 마지막 일정. 즐겁게 여행을 마무리하는 걸 자축하는 의미로 맥주 한 잔 시켰어요. 치킨 주문했는데 나오는데 30분 넘게 걸립니다. 저는 이민가서 해외에서 사는 건 못할 것 같아요. 유럽이나 동남아의 느린 문화는 너무 답답해요. 한국이 저에게는 속도가 딱 맞아요. "빨리, 빨리." ^^ 평생 피디로 일하며 시간에 쫓기며 살아서 그런가 봐요.
뒷자리 손님에게 종업원이 맥주가 어떠냐고 묻자 "It's dangerously easy drinking."라고 하네요. "술이 술술 넘어가서 겁이 나네요." 이런 재미난 표현, 좋아합니다. ^^
운하를 따라 걸으며 숙소로 돌아갑니다. 다음편에서는 유럽 일주 마지막 여행기로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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