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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떠났다> 제작후기

by 김민식pd 2018. 8. 14.

(드라마를 만드는 노동자로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습니다. MBC 노동조합 회보에 실은 글을 공유합니다.)


올해 초, 드라마 복귀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드라마 제작편수가 평년보다 수십 편이나 늘어나서 배우나 스태프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시청률 경쟁은 예전보다 훨씬 치열해진 상황에서 7년 만에 복귀하는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들었거든요. 가장 큰 걱정은 드라마 제작 현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이었습니다. 드라마를 연출할 때마다 늘 아팠어요. 야외촬영을 할 때는 새벽 4시까지 찍고 집에 돌아가 씻고 한 시간 정도 눈 붙이고 옷 갈아입고 다시 오전 7시에 나갑니다. <내조의 여왕>이 끝나고 대상포진에 걸렸고, <여왕의 꽃>을 찍을 땐 2달 넘게 심한 목감기에 시달렸어요. 영양제 주사를 맞으려고 병원에 갔더니 간호사가 그러더군요. “이렇게 비싼 주사 한 방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평소에 잠을 푹 주무세요.” 몇 년 전에는 함께 일하던 편집자가 잠시 눈을 붙이겠다며 5층 숙직실에 갔다가 쓰러져 그 길로 세상을 떠난 일도 있어요. 유가족이 영정을 들고 고인이 마지막까지 밤을 새워 일하던 편집실에 왔습니다. 편집기 옆 달력에는 방송 종료 날짜에 커다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어요.

드라마 복귀를 준비하면서, 남몰래 빌었어요. ‘제발 드라마를 만드는 동안, 아프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해주세요.’ 어떻게 하면 노동량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이별이 떠났다>라는 대본을 선택했습니다. 스펙터클한 장면보다는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 묘사로 이야기가 진행되기에 촬영에 드는 노동 강도가 덜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주말특별기획은 제작비가 미니시리즈보다 더 작기 때문에 스튜디오 녹화가 필수입니다. 야외 촬영과 세트 녹화를 나눠서 진행하기에 야외 팀이나 세트 팀에게 각각 최소 3일의 휴식 시간을 보장해 줄 수도 있고요. 

김만태 촬영감독을 만난 건 최고의 행운입니다.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의 MBC 협회장으로 일하는 김만태 조합원은 드라마 촬영 현장의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해왔더라고요. 처음 만난 날, 의기투합했습니다. 드라마 제작 현장 개선에 최선을 다해보자고. 촬영은 하루 16시간으로 제한하고, 휴게 시간은 최소 8시간 보장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김만태 감독의 능률적인 촬영 콘티 작업 덕분에 철야 없이 방송 분량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가 끝난 지금, 저는 전혀 아프지 않아요. 이번 드라마를 만들면서 자정을 넘겨 일한 적이 거의 없거든요. 

노동법 개정안이 시행된 7월 이후, 노영섭 조합원이 진행한 야외 촬영은 대부분 오후 8시에서 10시 사이에 끝났습니다. 자정을 넘긴 경우는 딱 3번인데 두 번은 00시 30분경에 종료했고, 딱 한 번 새벽 2시 10분에 끝난 날이 있는데요. 그 다음날부터 3일간 촬영을 쉬었습니다. 

연속극을 만들 때, 가장 신경이 쓰이는 대목은 야외 촬영분과 세트 녹화 분량 간에 영상의 톤을 맞추는 것입니다. 스튜디오 조명을 맡은 나재희 감독님이 섬세하게 빛을 잡아주셨고, 박형준 감독님이 이끄시는 스튜디오 카메라팀 (김민성 이덕훈 이종현 조합원)은 정교한 카메라 워킹으로 멋진 그림을 만들어주셨어요. 7년 만에 복귀하는 연출의 부족함을 영상 및 기술 부문 조합원들이 탁월한 기량으로 메워주시는 걸 보며 “역시 MBC는 구멍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조직이다!”하고 느꼈어요. 미욱한 연출을 도와주신 조합원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낍니다. 밥은 제때 챙기고 잠은 꼭 재우자는 당연한 이야기를 무슨 대단한 성과처럼 말하는 것도 민망하군요. 야외팀과 세트팀은 번갈아가며 쉬지만 연출부나 미술센터 직원들은 항상 일을 해야하고 심지어 쉬는 날까지 회사에 나와 다음날 진행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드라마 제작현장에 만연한 과다 노동을 줄이는 건 연출과 촬영 감독의 의지만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위장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이범연 지음 / 레디앙)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정규직 노동자의 꿈은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삶의 표준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벌어들이는 돈의 크기가 아니라 여가를 누리고, 문화적 삶을 향유하고,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양하게 참여하는 풍부한 '삶의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이 정도의 삶은 살아야지'라는 '삶의 모범'을 만들어야 한다.’


52시간 노동 준수하며 방송 만들기, 분명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규직 노동자이자 MBC 조합원으로서 제가 꿈꿔야 할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를 빌려, 도와주신 모든 조합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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