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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은 나의 힘

by 김민식pd 2018. 5. 25.

저는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내신등급이 15등급에 7등급입니다.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를 맴돌았지요. 3학년 1학기 중반에 모의고사를 봤는데 50명 중에서 22등을 했습니다. 진학상담을 했더니 제 성적으로는 서울로 올라가기 힘들더라고요. 무척 우울했어요.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공부 못한다고 맞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어요. 아이들이 저의 외모를 비하해서 만든 별명이 있는데, 집근처 대학에 진학하면 그 별명이 계속 저를 쫓아다닐 것 같았어요. 아버지와 고향 친구들에게서 달아날 수 있는 길은 서울로 대학을 가는 일이었어요. ‘남은 6개월 동안 죽었다 생각하고 미친 듯이 공부하자. 그것만이 살 길이다.’

마음먹는다고 공부가 술술 되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어요. 성적이 안 나오면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았어요. 그럼에도 공부가 잘 되지는 않더라고요. ‘매 맞기 싫어서’ ‘출세하지 못할까봐’ 이런 부정적 동기부여는 사람을 위축시키고 지치게 합니다. 긍정적 동기부여가 필요해요.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있었어요. 서울에 사는 그 여학생을 생각하며,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녀를 만나러 서울로 가자’고 결심했지요. 그녀의 사진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주의가 흐트러질 때마다 사진을 보며 다짐했지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서울로 올라가 찾아갈게요.’

고교 시절 제가 짝사랑하던 소녀는 당시 하이틴 모델로 활동하던 채시라였어요. 나와 동갑인 여고생 채시라가 활짝 미소를 짓는 초콜릿 광고를 보고 사랑에 빠졌지요. 잡지에서 광고를 정성껏 오려내어 독서실 서랍에 넣어뒀어요. 경상도에 사는 내가 채시라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서울로 대학진학 하는 일 뿐이라 믿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가 안 될 때는 채시라의 사진을 보며 시를 쓰기도 했어요. ‘나의 마돈나여’ 어쩌고저쩌고. 부치지 못한 팬레터는 독서실 책상 앞에 붙여뒀어요. 힘들 때마다 나의 결심을 독려하는 용도였지요. 



머리 싸매고 공부한 끝에 학력고사를 보니 반에서 2등을 했어요. 6개월 만에 학급석차 22등이 2등이 되자, 학교에서 난리가 났어요. 컨닝을 했니, 찍었느니 말들이 많았지만, 저는 조용히 사진 속 그녀를 보며 웃었어요.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나를 성장시키는 최고의 동기부여는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저 멋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내가 되어야겠어.’ 이런 다짐 하나로 우리는 힘들어도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일을 합니다.

대학에 진학하고는 정작 채시라씨를 감히 만날 생각을 못했어요. 숱한 소개팅 미팅에서 차이면서 저의 현실을 자각했거든요. 동아리 후배한테도 차이는 내가 어찌 감히 만인의 연인에게 들이댈 수 있겠어요. 첫 눈에 반한 대학원 후배를 쫓아다니다 결혼한 지 벌써 20년이 되어갑니다. 광고 속 채시라의 모습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고요, 외모가 볼품없는 저를 남편으로 맞아준 아내에게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2012년 MBC 노조 집행부로 170일간 파업을 한 이래, 7년 가까이 드라마 연출이라는 현업에서 배제되어 살았어요. 작년 한 해, 파업을 통해 MBC가 정상화되고 그 덕분에 올 1월에 MBC 드라마국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업무 복귀한 첫 주에 드라마국 부장님이 제게 메일을 보냈어요. ‘드라마 복귀를 축하합니다. 좋은 대본이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배우 채시라 씨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작품입니다.’

7년만의 드라마 복귀작을 30년 전의 짝사랑과 함께 하게 되었군요. 내일부터 방송될 MBC 주말특별기획 ‘이별이 떠났다’ 테스트 촬영을 하면서 조연출에게 속삭였어요. “내가 채시라에게 큐 사인을 주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만들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이별이 떠났다>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45분 4회 연속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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