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가수에서 '자우림'과 '김경호'의 무대가 화제다. 내가 둘을 만난 건, 1997년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조연출로 일할 때 일이다.
사실 MBC 입사하고, 겁이 났던건 사실이다. 방송에 완전 문외한이었고, 미디어 전공은 커녕, 언론사 스터디나 방송 관련 수업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MBC에서 PD를 뽑을 때, 데려와서 당장 부려먹을 사람을 뽑지 않았다. 기술적 역량보다는 성품과 기질을 본다. 기술은 와서 조연출 기간 5년 동안 가르칠 수 있지만, 성품과 기질은 가르친다고 바뀌는 게 아니니까.
조연출로 처음 맡은 프로그램이 '인기가요 베스트 50'이었다. 요즘 하는 '음악 중심'같은 가요 순위 프로그램이었다. 생방송이기 때문에 사전 녹화나 편집이 거의 없고, 구성도 별로 없다. 그냥 가수 섭외를 하고, 순위 메기고, 무대에 세우면 그만이다. 촬영이나 편집, 기획안 구성의 경험이 전무했던 나를 위해 회사가 배려해 준 것이다. (곧 MBC 공채가 시작된다. 끼가 있다면, 열정이 있다면, MBC를 믿고 자신을 맡겨달라.)
이렇게 평이한 게 가요 순위 프로그램인데, 당시 연출하던 이흥우 선배는 욕심이 많았다. 매주 하나씩 새로운 테마를 정해 그에 어울리는 무대를 꾸몄다. 음악 생방송 프로그램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고 싶어한 것이다. 연출이란 이런 것이다. 남들과 똑같이 하는 것을 싫어한다. 어떻게든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고 싶어한다. 그게 연출이다.
이흥우 선배님이 주도적으로 시도한 것이, 라이브 무대의 도입이었다. 어떤 주는 테마가 '라이브 킬드 립싱크 스타' Live Killed Lipsync Star'였는데, 완전히 공격적인 선언이었다. 음악 프로에 나와 가수가 노래를 할 때, 보통 MR이나 AR을 사용한다. 여기서 MR은 Music Recorded, AR은 All Recorded. 즉 AR은 그냥 립싱크다. 반주랑 노래가 다 녹음되어 있어 춤추고 입만 뻥긋이면 된다. TV는 붕어빵 무대라고 놀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보통 음악을 녹음한 MR에 가수가 노래를 하면 라이브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흥우 선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반주도 라이브로 연주하길 원했다. 그게 진짜 라이브니까. 그러나 97년 당시는, H.O.T.와 젝스키스 등, 원조 아이돌들이 주름잡던 시대였다. 어디서 라이브 가수를 찾지?
매주 라이브 밴드 연주가 가능한 팀을 하나씩 찾는 것도 일이었다. 그때 누가 말을 꺼냈다. "드라마국 황인뢰PD가 '꽃을 든 남자'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주제가 반응이 좋다며?" "완전 신인이던데... 홍대 앞 인디밴드라던가?" "뭐? 밴드!" 당시 우리는 밴드라는 소리만 들으면 귀가 번쩍 했다. "그럼 라이브 무대도 할 줄 알겠네?" "근데 TV 출연 한번도 안해본 인디밴드인데 잘 할까요?" "라이브만 되면 되지 뭐." 그렇게 나온 자우림은 첫 무대에서 '헤이 헤이 헤이'를 부르며 시청자들을 완전 매료시켰다. 여의도 D공개홀에서 생방송을 하는데, 다른 스튜디오 부조에서 방송화면을 보던 선배가, "쟤는 누구야?" 하며 달려왔던게 기억난다. 그만큼 김윤아는 첫 등장부터 화끈했다.
밴드를 찾아헤매다, '록밴드나 헤비 메탈은 어떨까?' 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들의 연주력이 좋긴 하지만, 아이돌이 장악한 가요 프로그램에 내보내기에 헤비 메탈은 이질감이 있었다. 그때 메탈하는 어느 신인 가수가 발라드를 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경호였다. 그의 첫 무대를 준비하며 악기 세팅을 체크하는데 내내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런 사람이 헤비 메탈을 한다고? 하지만, 그의 노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은 완전 압권이었다. 무대 뒤에서 지켜보던 어린 아이돌 가수들의 표정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저게 진짜 노래구나...'
난 자우림과 김경호를 한데 묶어 순위 소개도 찍었다. 김경호에게 VJ 특유의 발랄한 표정으로 '이번주 13위 곡은 지난주에서 8계단 상승한~', 이런 멘트 주문하는 것, 결코 쉽지 않았다.ㅠㅠㅠ 다행히 자우림의 멤버들이 의외로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어, 그들을 많이 활용했었다. 촬영하다 친해져서 김경호 콘서트나 자우림 공연에 놀러가기도 했다. 김경호의 'Youth Gone Wild'를 보며, '저 사람 진짜 메탈 가수 맞구나...' 폭발적인 무대매너를 가진 그에게 깜찍한 표정의 순위 소개를 주문한 것이 무척이나 민망한 순간이었다. 자우림이 '일탈'을 부를 때 흥에 겨워 일어나 춤을 췄는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 끝까지 혼자 객석에 서서 춤 췄던 기억이 난다. 이것도 민망한 순간인가?
예능 초년병 시절의 기억을 되새겨 보는 이유? 요즘 나가수를 보며 이들의 컴백이 반가워서. 물론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다만 그들을 대중 앞에 불러낼 장치가 없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97년 당시에도 이흥우 PD가 라이브 무대를 기획한 덕에 우리는 자우림과 김경호를 알게 되었다.
결국, 예능 PD가 만드는 것은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라 문화다. '무한도전'이 매번 새로운 놀이 문화를 대중 앞에 선보이고, '1박2일'이 전국적인 캠핑 붐을 일으키고, '나가수'가 아이돌 중심의 가요 산업에 변화를 일으키듯, 잘 만든 예능 프로그램은 문화를 선도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런 예능 프로를 만들까? 공부하지 마라. 놀아라. 책 보고, 영화 보고, 공연 보고, 전국을 누비며 놀아라. 그래야 재미난 무언가를 찾아내고, 그걸 대중과 나눌 수 있다. 제발 예능 PD가 되겠다고, TV 앞에 앉아 예능 프로 비평만 하지 말라. TV 밖에 더 재미난 세상이 있다. 그 즐거운 세상, TV 안에다 그려내는 게 그대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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