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PD로 10년을 근무한 후, 드라마국에서 실시한 사내공모에 응시했다. 드라마PD로의 직업 전환, 과연 순탄할까?)
입사 10년 만에 면접을 보긴 처음이었는데, ‘어떤 드라마를 연출하고 싶으냐?’ ‘연출의 기회가 예능에 비해 많지는 않을 텐데 괜찮겠느냐?’ ‘드라마에 오면 조연출을 다시 할 각오는 있느냐?’ 등등의 질문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질문이었다. ‘당신은 운이 좋은가?’ 너무 황당해 당황스러웠지만, 무사히 잘 넘길 수 있었다. 역시 운이 좋은 건가?
국을 옮겨 처음 맡은 임무는 시즌드라마 개발이었다. 미니시리즈나 연속극은 이미 기성작가와 스타 PD들이 독식하는 장르로 새내기 연출이나 신인 작가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신인작가나 연출 등용문이었던 단막극은 시장의 논리에 의해 폐지된 상황, 회사에서는 단막극과 연속극의 중간 정도의 형태로 주간단막극을 주문했다.
예능국에서 일하다 같이 옮겨 간 노도철 PD (주간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를 성공시킨!)와 함께 기획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노도철 PD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흔히 메디컬 드라마라고 하면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응급실 상황이나 심장외과 등을 다루는데 우리는 가벼운 세태풍자를 겸해서 압구정동의 성형외과를 다루면 어떨까? 그래, 남들이 메디컬 드라마 만들 때, 우리는 메디컬 시트콤을 한번 만들어보자. 시즌드라마 ’비포 앤 애프터 성형외과‘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뮤지컬 배우 홍지민 씨를 처음 TV에 캐스팅한 게 나였다. 나중에 홍지민과의 인연에 대해 글을 올리련다. '비포 앤 애프터 성형외과' 배우들과 함께.)
이후 노도철 PD는 본격 메디컬 드라마 ‘종합병원 2’의 연출을 맡았고, 나는 다른 드라마 PD 2명과 함께 ‘비포 앤 애프터’를 연출했다. 나름 시트콤의 재미를 드라마에 접목시켜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했는데, 드라마 선배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드라마 국에 왔으면 드라마를 만들어야지, 시트콤을 만들면 쓰나.’
또다시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다. 애초에 드라마로 올 때엔 시트콤처럼 가볍고 발랄한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의도였는데, 자칫하면 웃기지도 않고, 울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오겠구나.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드라마, 어떻게 만들 것인가?
자아반성 끝에 느낀 점은 시트콤에서 즐겨한 현장 중심의 코미디 연출은 드라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트콤에서는 연출자의 재량에 따라 배우들에게 현장에서 즉흥연기를 끌어내거나 통통 튀는 화면 연출로 예능 특유의 웃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그런 경우 감정선이 툭 툭 튀어서 시청 몰입에 방해받기 쉬웠다.
코미디는 대본의 틀 안에서! 연기자의 즉흥 연기나 과도한 연출은 배제하고 작가가 펼쳐놓은 대본의 틀 안에서 놀자! 이렇게 결론 내었다. 이후 나는 재미와 감동이 잘 조화된 대본을 찾아 헤매었다. 그때 예전에 ‘논스톱’ 시리즈에서 연출과 대본으로 만나 10년간 인연을 맺어온 박혜련 작가(역시 드라마로 옮겨 예능과 드라마가 잘 조화된 ‘드림 하이’를 집필!)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트콤 경험이 있는 후배 작가가 이번에 드라마 대본을 썼는데 한번 읽어봐 달라고...
그렇게 해서 읽어 본 대본이 박지은 작가의 ‘내조의 여왕’이었다. 바로 이거야! 난 무릎을 쳤다. 공부는 일등이나, 사회생활은 꼴찌인 남편. 학창시절엔 퀸카, 결혼하고는 무능한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아줌마. 직장 생활을 코믹하게 풍자하면서 부부간의 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드라마. 내가 찾던 대본이 여기 있었구나! 그길로 제작사를 찾아가 연출하고 싶다는 의사도 밝히고, 회사에 연출을 지원했다.
그러나... 드라마 연출 경험이 일천한 내가 들이댄다고 쉽게 기회가 오는 건 아니었다. 로맨틱 코미디 연출 경험이 풍부한 다른 드라마 선배가 작품을 맡게 되었고 난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무척 자존심 상하는 순간이었으나 다시 용기를 내어 조연출이나 공동연출이라도 시켜달라고 회사에 졸랐다. 그 대본이 어떻게 드라마로 만들어지는지 꼭 보고 배우고 싶었으니까. 자존심, 그까이 꺼! 어차피 드라마를 배우려고 드라마로 옮겼으면 바닥부터 다져야지!
(드라마 PD의 길,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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