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작가님의 에세이, <5년만에 신혼여행>을 읽었어요. 처음 책을 잡았을 때는, 결혼 후 5년만에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지요. 저는 MBC 예능국 조연출로 일하던 나이 서른 셋에 결혼했는데요. 2000년 당시 2주간 신혼여행을 떠났어요. 여행 중독자인 저는, 예능 조연출 시절 강도 높은 노동에 지쳐있었어요. 여행을 가고 싶은데, 최고의 알리바이가 바로 신혼여행이었어요. 주간 단위로 돌아가는 프로그램 조연출의 경우, 대개 1주일 정도 결혼 휴가를 내는데, 저는 2주간 냈어요. "평생 한번 가는 신혼여행, 멋지게 다녀오고 싶습니다!" 하고 외쳤지요. 제가 없는 동안 선배 연출이 빡세게 고생을 했지만, 뭐.... 평소에 내가 열심히 일했으니까... ^^ 그 이후로 MBC 예능국에서 휴가를 2주씩 내고 신혼 여행 떠나는 일이 많아졌다는 거. 역시! 직원 복지 증강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자뻑'에 취해삽니다. 일은 몰라도, 노는 데는 제가 선수거든요. ^^

직장인에게는 최고의 알리바이가 될 신혼여행 카드를, 장강명 작가는 5년 뒤에야 쓰는군요. 기자로 일하며 휴가를 내면,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한 편씩 쓴다는 이야기에 머리를 칩니다. '작가는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책을 쓴다는 핑게로 여행을 다니는 저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장강명 작가는 공대를 나와서, 언론사를 다니다, 책을 냈는데요. 책 첫머리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대체로 무언가를 때려치우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면서 정체성을 쌓아오지 않았나 싶다. (중략)

군대에 있을 때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병장 때쯤. 기자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결심을 한 게 맞지만, 공업수학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적어도 공학을 더 공부하는 게 내 길이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공업수학 강의를 들으면서 그때까지 평생 어떤 공부를 하면서도 얻지 못한 교훈을 배웠다. 바로 '아, 내 머리는 여기까지구나'라는 깨달음이었다.


(<5년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 한겨레 출판 17쪽)


확 와닿았어요. 저는 대학 다닐 때, 공업수학이 늘 F였어요. 성적이 나오면 동기들을 수소문해서 C가 나온 친구를 찾습니다. 그들 중에는 교수님께 부탁해서 아예 F로 처리해달라고 하는 이도 있어요. 재수강을 해서 학점을 높이려는 거지요. 학점관리를 위해서. 저는 그런 친구랑 함께 교수님 사무실을 찾아가요. "저랑 이 친구랑 학점을 바꿔주시지요. 이 친구는 재수강을 원하니 F를 주시고, 저는 재수강 한다고 성적이 좋아질 리가 없으니 그냥 D를 주시면 어떨까요?"

공업수학을 공부하면서 좌절했어요. '아, 나는 머리가 나쁜 사람인가 보다.' 괴로운 수학을 재수강하느니,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영문 소설이나 마음껏 읽자.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영어책을 들고 사니까, 영어가 술술 늘더라고요. 이후 저는 제가 못하는 일에 굳이 공을 들이지 않아요. 좋아하고 잘 하고 싶은 일에 노력을 기울입니다.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 없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그것만 열심히 하고 살자는 주의입니다. 현실이 힘들 땐, 현실도피도 도움이 됩니다. 


장강명 작가에 대한 나무 위키 소개를 보면, 

'어렸을 때부터 SF를 좋아했고, 하이텔의 과소동(과학소설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단편을 올린 적이 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월간 SF 웹진' 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잡지도 창간해 운영했다고 한다'

저 역시 SF 마니아에 나우누리 과학소설 동호회에 아시모프 단편을 번역하며 활동했지요. 그래서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하고요. 장강명 작가의 다채로운 이력을 보면서, '어쩌면 이분도 SF를 즐기면서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를 꿈꾸는 게 훈련이 된 덕분에 이런 멋진 삶을 즐기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책이 주는 최고의 미덕은, 힘든 현실로부터 즐거운 도피를 제공한다는 점이지요. <5년만에 신혼여행>은 장강명 작가가 아내와 함께 4박 5일 보라카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인데요. 읽으면서 머릿속에 몇년 전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온 풍경이 그대로 그려졌어요. 한번도 가보지 못한 페어웨이 리조트에서, 마치 발코니에 내놓은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망고 셰이크를 마시는 듯한 기분?

<5년만에 신혼여행> 

여행기인줄 알았는데, 달달한 로맨스 소설 한 편 읽은 느낌이에요. 소설가 장강명의 내밀한 속내를 엿볼 수 있어 좋았고요. 

여행을 떠나고 싶은 분이나,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분이나,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에세이입니다.

떠날 수 있어서 좋고, 돌아올 수 있어 좋은 것이 여행이거든요. 본격 리뷰는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당~^^

'공짜 PD 스쿨 >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뮤즈부터 구하자  (18) 2018.03.09
5년 뒤, 어디에 있을 것인가  (13) 2018.03.08
이토록 로맨틱한 여행기  (11) 2018.03.06
알게되면 좋아하게 된다  (14) 2018.03.02
비관은 기분, 낙관은 의지  (20) 2018.02.22
행복은 바나나  (21) 2018.02.08
Posted by 김민식pd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마들렌 2018.03.06 0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때문에 아침을 일찍 시작해서 혹시나 글이 올라왔을까 하고 들어와봤는데... 와~~~ 이른 새벽에 글올리셨네요... 항상 재밌고 교훈적인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중학생인 제 아들에게도 선생님 블로그 들어와서 글 읽어보라고 하고 있어요
    제가 해주지 못하는 좋은 말씀들이 많아서요^^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2. cyanluna 2018.03.06 0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저도 신혼여행 필리핀으로 다녀왔는데.. 읽어보면 그때 여행 때 생각이 무럭무럭 떠오를것같아요 ^^

  3. 미나리 2018.03.06 0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D와 F를 바꿔주세요" 에서 빵 터집니다
    천재십니다 ㅎㅎㅎ

  4. vivaZzeany 2018.03.06 0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공감이 확!
    수업시간에, 나는 어디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나도 모르게 먼 곳은 다녀오던 시간들이 떠오르네요. ^^

    저는 책은 주로 정보성 책들만 읽었어요.
    아이들 때문에, 주로 건강, 환경, 식재료(텃밭) 등에 관한 책만 읽었지요.

    그러다보니 소설이나 에세이 등의 책은 안 읽은지 오래 되어서,
    PD님께서 소개해 주시는 작가님들은 거의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네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읽게 되기를 바라며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

    꼭두새벽에 올려주시는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배우는 것도 많구요!

    오늘도 웃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5. 아리아리짱 2018.03.06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아리!
    Pd님 추천으로 지난주 장강명 작가님의 책들을 빌렸는데, 우와~ 이런 우연이!
    5년만에 신혼여행 얼른 읽어 봐야죠! Go!

  6. 섭섭이짱 2018.03.06 1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오늘은 PD님의 최애작가 장강명 작가 책이네요. ^^ 이번 책은 안 읽어봤지만, 보라카이하고는 인연이 많아서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네요. PD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7. 정지영 2018.03.06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낯선 이의 이름이 친숙해질때...
    기사를 보다가, 라디오 듣다가도
    그 이름만 눈에 귀에 콕 박힙니다.
    장강명 작가님을 예전부터 안것처럼...
    작가 사인회라도 찾아가야겠어요.
    가서... 김민식 PD님 아시죠? ㅎㅎ
    그분 소개로 작가님 팬됐어요^^

  8. 아로마 2018.03.06 17: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 2월에 경향신문 요조 인터뷰 기사를 보고
    책 이게뭐라고 팟캐스트를 알게되고
    팟캐스트를 듣다가 김민기 피디와 장강명작가를 알게되었고
    "매일 아침...."과 "한국이 싫어서" 그리고 "눈이 아닌 것으로 읽은 기분"를
    구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이 연쇄적인 효과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ㅎㅎ

    근데 위 세 종류 책중에서 "한국이 싫어서"가 가장 재미있어요 ^^

    김 pd님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소개해주세요.

  9. 영어타파 2018.03.08 2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되는 영어잡고있으려니힘드네요 기준에 못미치는 실력확인할때마다 비교하게되고 창피하고 너무 마음적으로 힘들어요 잘하는건안바래요 중간이나갔음 좋으련만...남들은 얘키우며 직장다니면서도 잘만하는데 솔로라 남아도는시간 매일영어랑 씨름하는데도 왜마냥 초급을못벗어나는지 이러면서도 내일 영어공부하러가겟지만 이런우유부단함때문에 이러고있나바여 갑갑함에 푸념남기고갑니다. 내 머리는 어디까지일까? 강해져라멘탈 TT

  10. 김민석 2018.03.10 05: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강명 작가라는 분이 계시는군요. 좋은 작가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