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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행복은 바나나

by 김민식pd 2018. 2. 8.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김보통 / 한겨레 출판)


김보통 작가님을 좋아합니다. 이분은 정말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작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에서는 직장을 그만두고 나온 후, 만화가로서의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제 인생의 행복 역시,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첫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온 순간 시작되었어요. 모두가 말리는 일을, 혼자만의 결정으로 밀어붙인 순간, 진짜 어른이 되는 기쁨을 맛 본거죠. 행복은 혼자만의 선택을 하는 용기에서 비롯되거든요.

본업은 만화가이지만, 요즘 에세이를 즐겨 내시는 김보통 작가님의 에세이,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을 읽었어요. 첫번째 글부터 마음에 쏙 듭니다. 


행복은 바나나

행복이란 바나나와 같다. 내겐 그렇다.

너무 달지 않고 시지 않으며 껍질은 까기 쉽고 씨도 없다. 부드러워 먹기 편하고 양도 적당하다. 과일의 왕이다. 


바나나를 숭배하는 대학생 김보통에게 아버지가 그래요. '너는 바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과일이 있는데 겨우 바나나가 제일 좋다니. 한심한 녀석. 두리안도 먹어 보고, 애플망고도 먹어보고, 패션후르츠도 먹어보고 한 다음에야 어떤 게 제일 맛있는가를 결정해야지 먹어본 것도 별로 없으면서 그런 흔한 과일을 최고라고 하는 건 어리석은 거야."

김보통 작가는 군 제대 후, 유럽 배낭여행을 갑니다. 반년이 넘도록 유럽을 유랑하며 온갖 과일을 다 먹어봐요. 그러고 난 후, 내린 결론. '역시 바나나가 최고다.' 후훗~^^


저 역시 바나나를 좋아해요. 작년에 탄자니아 여행을 갔을 때, 하루에 바나나 4~5개씩 먹었어요. 간단하고 저렴한 배낭여행자의 아침 식사. 콘프레이크에 우유를 붓고 바나나를 조각 내어 넣어 먹습니다. 적당히 달고 맛있고 영양가도 있어요. 동남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방에서는 가격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은 과일이 바나나에요. 가성비를 높이는 최고의 방법은 분모를 낮추는 일입니다. 탄자니아 바나나는 개당 100원 정도 합니다. 싸고 달고 맛있어요. 바나나는 칼이 없어도 어디서나 쉽게 껍질을 벗길 수 있어요. 물에 씻지 않아도 되고요. 간편함과 가성비를 추구하는 배낭족에겐 최고의 과일이지요. 


어렸을 때, 아버지는 저에게 의대 진학을 강요했어요. 

"아버지, 저는 피를 보는 것도 무섭고요. 성격이 까불까불한 편이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은 못 할 것 같아요." 

"그럼 넌 뭘 할래?" 

"저는 도서관에서 책 읽는 게 제일 좋아요. 문과에 진학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에 의사가 얼마나 좋은데, 겨우 글쟁이가 되겠다니, 너는 바보다. 의사가 되면 돈도 많이 벌고, 존경도 받는데."

"아버지, 저는 돈을 벌지 않아도 좋고, 남들 존경도 필요없으니 그냥 저 혼자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요. 의대 갈 성적도 당연 아니고요."

"네가 의지가 부족한 거다.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으면, 공부야 열심히 하면 되지. 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게 말이 되냐? 공부하기가 싫은 거겠지."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이과를 선택했다가 인생이 정말 힘들어졌죠. 나이 스물에 내린 결론,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부모 조차 나를 이렇게 모르니, 결국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로구나.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고 있어요. 이걸 찾아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50에,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술도 먹어보고, 춤도 춰보고, 여행도 다녀보고, 연애도 해보고, 드라마 연출도 해보고, 재미난 일은 다 해봤는데요. 제일 마음이 편할 때는 도서관에 앉아 책 읽을 때에요. 돈도 안 들고, 스트레스도 없어요. 다른 사람을 설득할 필요도 없고요. 그냥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놀이에 심지어 돈 한 푼 안드는데, 인생에 이보다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행복은 바나나에요. 수박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여름철에만 행복하겠지요. 두리안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돈이 많아야겠지요. (꽤 비싸거든요.) 바나나는 사시사철 싸게 구할 수 있고요. 심지어 세일할 때 사서 냉장고에 얼려놓고 가끔식 얼린 딸기와 함께 딸바(딸기바나나) 셰이크를 해서 먹어도 좋아요. 어렵게 구할 수 있는 행복보다 작고 확실한 행복이 더 좋아요. 

'굳이 힘들게 의사가 되어야만 행복한게 아니라, 도서관에만 가도 행복하다.'

이게 50년을 살며 찾은 제 인생의 행복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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