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등학교 진로 담당 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은 일본 식민지 시절 이식된 권위주의 교육의 잔재라고요. 권위주의 교육의 특징은, 학습에 있어 교사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는 겁니다. 모든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 있고, 질문하는 것은 교사의 영역이지 학생의 영역이 아니라고. 일본은 이런 권위주의 교육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일본 제도권 교육의 틀은 1900년대 초 독일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독일이 권위주의 교육의 종주국이지만 지금 그 틀을 유지하는 건 전 세계에서 일본과 한국뿐이랍니다.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권위주의 교육을 폐지하거든요.

 

2차 대전의 패망 이후, 독일은 패전의 원인을 분석합니다. 독일이 패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도덕적 명분 싸움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유태인 학살과 소수민족 탄압을 통해 독일은 2차 대전에서 악의 축으로 떠올랐어요. 연합군은 독일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기를 올립니다. 나치와의 싸움이 악을 응징하는 전쟁이 된 것이지요.

 

독일은 전후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았어요. 왜 우리는 히틀러의 선동에 넘어가 그토록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던가? 독일인이 특별히 사악한 민족이던가? 아니에요.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일하는 게르만의 특성이 특별히 악하지는 않았어요. 아이히만처럼. 그들은 교육에서 답을 찾습니다. 권위주의 교육을 통해 독일은 산업 혁명을 앞당겼어요. 능률과 효율성을 중시하고 시스템과 매뉴얼에 충실한 노동자를 대량생산하는데 권위주의 교육이 적합했던 거지요. 다만 그것이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을 가진 시민을 길러내는 데는 부족함이 컸어요. 독일이 전후 유럽에서 존경받는 지도자 국가로 거듭난 데는 교육을 바꾸어 과거를 반성한 공이 큽니다. 한편 일본은 아직도 권위주의 교육을 고집하면서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지요. 일본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경제력으로 보면 동북아에서 존경받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인데 아직도 주변국 사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거든요. 세상이 빠르게 변화할 때, 우리는 교육을 돌아봐야 합니다.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이혜정 / 다산에듀)에 이어 읽은 책입니다. 한국 교육의 문제를 시험에서 찾고 있어요. 저 역시 한국 교육은 너무 많은 시험을 아이들에게 강제하면서 효율이 떨어진다고 믿습니다.

 

대학 졸업생들은 취업을 못해서 아우성인 이 와중에 정작 기업들은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하소연이다. 대졸 고학력자는 차고 넘치는데, 기업들은 뛰어난 스펙을 보고 뽑았는데도 일을 믿고 맡길 수가 없다고 불만들이다. 왜 이런 불일치가 생겨나는 것일까? 학생들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교육을 받지만 알고 보면 엉뚱한 능력만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의 시험> (이혜정 / 다산 4.0) 56

 

제조업 기반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던 시기에는 선진국 따라 하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해도 일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수용적 학습을 통해 얻은 능력만 가지고는 취업하기도 쉽지 않고요, 운 좋게 취업해도 조직에서 성과를 내기 힘듭니다.

 

OECD 교육국장인 이싱거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르치기 수월한 단순한 능력들은 머지않아 자동화 디지털화되거나 개도국으로 이전될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요?

 

- 국제적 트렌드와 과제에 대한 지식과 관심

- 개방성과 유연성

- 자존감과 회복탄력성

- 커뮤니케이션과 대인관계 관리

 

지난 1년간, 신문을 장식했던 많은 인물들, 우병우, 김기춘, 조윤선 그들의 특징은 우리나라 최고의 서울대를 나와 우리나라 최고 어려운 시험인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어진 힘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았다면 그들의 말로가 저토록 비참하지는 않았겠지요. 저들은 약자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사회지도층으로 가장 필요한 능력은 공감력인데 말입니다.

 

미래학자 제러미 러프킨은 인류가 경쟁의 문명에서 공감의 문명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21세기는 공감의 시대라 말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미래 인재의 조건들 중 하나로 공감력을 꼽았다. 교육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21세기에는 협력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며 공감력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대한민국의 시험> 123)

 

책 끝에서 저자는 미국 빈민가의 한 공립학교를 찾습니다. 교실에 가보니 선생님을 찾기가 어려워요. 교단을 보고 학생들이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며 앉은 게 아니라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제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앉아있기 때문이지요.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식 수업이 이어지면서, 아이들의 참여도도 높고 교육 만족도도 높아졌습니다. 교실 급훈이 인상적입니다.

 

읽으면 10퍼센트만 배우고, 들으면 20퍼센트만 배우고, 보면 30퍼센트만 배우지만, 토론하면 70퍼센트를 배우고, 직접 체험하면 80퍼센트를 배우고, 가르치면 90퍼센트를 배운다.

(위의 책, 325)

 

나는 이것이 4,50대 중년의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혀야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운 바를 세상 사람들과 나눠야 합니다.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옳은지 자꾸 질문을 던져야합니다. 책으로 읽은 것을 글로 정리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남에게 전할 때 더 큰 공부가 됩니다. 블로거의 공부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시험> 앞머리에 나온 이범 교육평론가의 추천사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학생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깨닫는 것이 있다. “정답은 문제집 뒤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답이 정해진 것만 가르치고, 정답이 정해진 것만 질문한다. (중략)

정답이 정해진 질문만 하는 것은 주인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노예를 키우는 교육이다. 자신의 논리와 정서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권위와 체계에 대한 순응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조선 시대만 해도, 과거 시험은 제목을 주고 시를 짓게 하거나, 국가의 중대사를 제시하고 거기에 대하여 논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100년 동안 우리는 정답을 빨리 찾는 훈련만 시키고 있다.

누구나 창의력과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지만, 교육을 이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방법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교사와 학생에게 진정으로 권한을 주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 책이 거대한 전환의 시작이 되기를 기원한다.

 

<대한민국의 시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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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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