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외대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을 읽고 이직을 결심했습니다. 21세기에 육체노동은 기계가 대신하고, 정신노동은 컴퓨터가 대신한다는 말에 겁을 먹었어요. 지식의 2차 생산(번역)은 인공지능이 대신할지 몰라도, 1차 생산(창작)은 오래도록 인간의 몫으로 남을 것이라는 예언에 통역사 대신 TV PD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는 <노동의 종말>일까요?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취미 삼아 SF를 번역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집 <Robot Visions>에 나오는 작품 중 재미난 것을 골라 나우누리 SF 동호회에 올렸는데요. 얼마 전 자전거 출근길에 영문 오디오북으로 <로봇 비전>을 듣다가 깜짝 놀랐어요. 아시모프는 이미 50년 전에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의 활약을 다뤘습니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미래를 SF로 미리 접한 덕분에 저는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었던 겁니다. 고전이 과거를 돌아보는 창이라면, SF는 미래를 보는 망원경입니다.

과학책의 명가, ‘동아시아출판사가 허블이라는 과학소설(SF) 브랜드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무척 반가웠어요. ‘허블에서 처음 나온 책이 <피코>라고 1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 작품집입니다, 대상을 수상한 <피코>와 우수상의 <코로니스를 구해줘>, 가작의 <네 번째 세계>가 있는데요. 김보영이나 김창규 같은 기성작가들의 소설도 함께 있어 저 같은 SF 마니아에게는 종합 선물 세트같은 책입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그린 <피코>의 작가 이건혁은 이렇게 말합니다.

 

‘SF 작가는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성장할지 다시 한 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퇴직 후 작가의 삶을 꿈꾸는 제게, 신인 작가들의 도전도 고무적이지만, 심사평도 큰 도움이 됩니다. 박상준 서울 SF 아카이브 대표는 이런 충고를 해요.

 

‘SF 소설 공모전도 결국은 일반 독자들을 위한 스토리텔링 솜씨를 겨룬다는 점에서 다른 주류문학 분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놀라운 과학적 상상력은 분명 SF의 미덕 중 하나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완성체가 될 수 없다. SF소설을 쓰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매끄럽게 읽히는 문장력과 구성력인 것이다.’

 

드라마 PD로서 극본 공모 심사를 자주 합니다. TV만 보고, 책은 거의 읽지 않는 작가 지망생도 있는데요, 그들의 원고를 읽는 건 곤욕에 가까운 일이에요. TV 드라마도 문학의 한 형식이라 믿습니다. 독한 설정과 극적인 반전만으로 승부하기보다 글의 완성도부터 높일 것을 권합니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비작가들이 가능한 한 많은 작법서들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순문학 작가든 장르문학 작가든 논픽션 작가든 등단하지 못한 작가든, 누가 썼든 상관없다. 소설을 쓰는 방법에 관해 서술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 권의 작법서에서 이런 건 주의해야 하는 구나싶은 깨달음을 단 하나라도 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허블 망원경은 10억 광년 거리의 별까지 관측합니다. 1광년은 1년 동안 빛이 이동한 거리입니다. 즉 우리는 허블 우주망원경을 통해 10억 년 전 어느 별에서 나온 빛을 봅니다. 허블 망원경을 통해 우리가 과거를 보듯, SF 전문 출판사 허블의 과학소설을 통해 미래를 엿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린 시절 스타워즈를 즐겨본 아이들이 자라나 미국의 과학 기술 발전을 선도하는 것처럼, 한국의 SF 팬들이 인공지능 시대의 주역이 되기를 꿈꿉니다.

 

(<비즈한국> 연재칼럼 <김민식의 인생독서>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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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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