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했던 강연 원고를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MBC 드라마 PD 김민식입니다.
행복심리학자 서은국 교수님이 쓴 <행복의 기원>을 보면, 진화는 자연선택과 성선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위를 할 때마다 행복을 느끼게끔 진화했다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위를 할 때마다 기쁨을 느낀 선조들 덕분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한 이유는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고, 매력적인 이성을 볼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짝짓기의 희망에 들뜨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 대학에 간 저는, 1지망에 떨어져 2지망 입학했는데요. 전공에 흥미가 없었어요. 학과 공부보다 미팅에 열을 올렸습니다. 즉 스무 살의 저는 생존보다 번식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겁니다. 그런데 미팅 나갈 때마다 차였어요. 어떻게 하면 짝짓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결국 연애의 고수라는 선배를 찾아갔어요.
“미팅에서 계속 차였다고? 그건 실패가 아니야. 전력을 다해 대시하고 싶은 여자를 못 만난 것뿐이지. 넌 왜 미팅에 목을 매냐. 진짜 승부는 헌팅에서 나는데.”
미팅에 나가면 어떤 상대가 나올지 알 수 없지만, 헌팅은 무조건 원하는 상대에게 대시할 수 있다는 거죠.
“헌팅은 어디서 하면 되나요?”
“헌팅은 역시 나이트클럽이지.”
나이트클럽이라면 날라리들이나 가는 타락의 온상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여자 한번 꼬셔보려고 선배를 쫓아 나이트에 갔어요. 선배가 저를 보고 한마디 하셨어요.
“넌 아무래도 외모가 많이 딸리니까, 춤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
1980년대 말 신촌로터리에 ‘우산 속’이라는 나이트가 있었는데요. 한쪽 벽면이 거울이에요. 거울 앞에서 혼자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처음엔 발로 박자를 맞추고, 팔로 하늘을 찔러댔어요. 음악을 알아야 리듬을 탈 수 있다고 해서 길거리 리어카에서 ‘DJ 리믹스’ 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듣고 팝송 가사도 외웠어요.
춤이라는 게 은근히 재미있더군요. 각각의 동작을 따로 익히지만 나중에는 다양하게 조합할 수 있어요. 매일 나이트에 가기는 힘드니, 나중에는 방에서 혼자 거울 보며 연습을 했어요. 이어폰을 꽂고 혼자 미친 듯이 흔들었지요. 매일 연습을 하니까 춤이 쑥쑥 늘더군요. 몸치인줄 알았더니 나름 흥이 있었어요. 춤은 많이 늘었는데, 춤을 잘 춘다고 연애가 되진 않더군요. 여자 만나려고 춤을 배웠지만, 나중에는 춤이 좋아 그냥 춤만 췄습니다.
<행복의 기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한다고 믿습니다. 화려한 조명이 빛나고 쿵쾅거리는 음악이 커다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나이트클럽에 가야만 춤이 즐겁다고 믿으면 유흥비로 많은 돈을 써야합니다. 예쁜 여자랑 춤을 추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거울 속 멋진 남자의 춤사위를 즐길 수 없어요. 춤의 즐거움은 강도보다 빈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춤을 출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즐거운 겁니다.
춤만 추면서 노니까, 전공 학점이 2점대였어요. 취업은 해야겠다 싶어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춤도 혼자 췄듯이, 영어도 혼자 공부했어요. 영어 공부에 대한 그릇된 믿음 3가지가 있어요. 영어를 잘하려면, ‘미국에 가야 한다.’ ‘원어민에게 배워야 한다.’ ‘돈을 들여야 한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했지요? 영어 공부 역시 마찬가지에요. 조기유학, 교환 학생, 미국 연수, 우리는 이렇게 영어 실력을 올릴 조건을 기다립니다. 영어 공부는 조건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이 순간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회화 책을 보고 그날 외울 문장 10개를 소리 내어 읽습니다. 그런 다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요. 영어 문장 한번, 한글 지문 한번. 지하철 타러 가면서 MP3를 들으면서 중얼중얼 따라합니다. 전철에 타면 한글 지문을 보고 영어 원문을 떠올려 봐요. 기억이 안나면 다시 영어 문장을 보고요. 저녁에 자기 전에 확인합니다. 10개를 내가 외웠는지. 하루에 회화 상황 하나씩 외웁니다. 영어는 일주일 내내 놀다가 일요일 하루 10시간 몰아서 한다고 늘지 않아요. 영어는 한번 이치를 깨달으면 평생 이해가 되는 과학이 아니에요. 외국어는 학문이 아니라 습관입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반복하는 습관을 통해 실력을 기릅니다. 마음잡고 하루 빡세게 공부하기보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공부한 영어 덕에 졸업하고 외국계 기업에 영업사원으로 취업했습니다. 한국 3M 헬스케어부문에서 치과 제품 영업을 했는데요. 치과 영업은 좀 힘들어요. 모든 사람이 울상으로 들어가는 곳에 혼자 활짝 웃으며 가거든요. “안녕하세요, 쓰리엠에서 나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고함을 지릅니다. “나가!” 그렇게 쫓겨나는 날은 우울해서 저녁에 동료랑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요. 술을 먹는다고 힘든 세일즈 업무가 편해지지는 않아요. 근무 중 느낀 모멸감은 퇴근 후에도 계속 떠오르는데 그러다보니 꼭 24시간 근무하는 것 같았어요. 무너진 자긍심을 살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평소 자신이 잘 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저의 경우엔 그게 영어였어요.
자존감을 다시 채우려고, 퇴근 후 영어 학원을 다녔습니다. 저녁 6시에 퇴근하면 전철을 타고 종각에 있는 종로외국어학원에 가서 통대 입시반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날 방송된 CNN 뉴스를 들려주고, 학생을 지목해서 우리말로 옮기라고 해요. 발표가 끝나면 다음 학생을 지목해서 틀린 내용이나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라고 하지요. 이 수업을 들으려면 뉴스도 집중해서 듣고, 다른 학생의 발표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수업 시간 2시간, 그날 하루 진상 고객과 호랑이 상사에게 받은 모멸감과 스트레스는 떠오를 틈이 없어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는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에서 암송을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수동적인 공부는 남는 게 없어요. 원어민 회화 수업에 가서 멍하니 구경만 해서는 늘지 않아요. 회화 문장을 외워야합니다. 문장 암기는 쉽지는 않지만 아주 버겁지도 않아요.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영어 공부에서도 몰입의 즐거움을 맛 볼 수 있습니다.
회사와 학원을 동시에 다니며 시험 준비를 해서 그해 가을 외대 통역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통대 공부도 만만치가 않더군요. 유학생과 교포 2세들 사이에서 고전했어요. 힘들 땐 무엇을 한다고요? 내가 가장 잘 하는 것. 통역대학원 재학생 중에서는 제가 춤을 제일 잘 췄어요.
야유회 가고 MT 가면 기타 메고 사회 보면서 춤을 췄어요. 다들 그랬어요. ‘통역사로 썩기엔 춤 솜씨가 너무 아깝다. 저렇게 잘 노는 사람은 예능 피디를 해도 잘 할 텐데!’ 그 소리에 혹해서 96년에 MBC 공채를 보고, 예능 피디로 입사하게 되었어요. MBC 입사해서도 늘 춤만 추었습니다. 조연출 때 선배가 시켜서 생방송 무대에 올라가 춤을 췄고요.
2012년 MBC 파업 당시 노조 부위원장이었는데요. 파업 프로그램 연출을 제게 맡기더라고요. 전 제가 가장 잘하는 걸로 승부를 봤습니다. 파업 홍보 동영상을 찍으면서 늘 춤을 췄어요. 심지어 MBC 노동조합 조합원 300명을 모아놓고 춤을 추게 했습니다.
MBC 프리덤이라는 뮤직 비디오는 유튜브에 올라간 즉시 조회수 30만을 기록하고 공전의 히트를 쳤지요. 이 작품을 연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회사에서는 정직 6개월의 징계를, 나라에서는 구속영장 2회 청구와 징역 2년형 구형이라는 영광을 내렸습니다. 그 후로 회사에서 제게 드라마 연출을 시키지 않더군요. 5년 되었는데, 아직도 개점휴업 상태입니다. 심지어 재작년에는 비제작부서로 좌천되었어요. 파업 끝난 지 3년이 지났는데 말이지요.
아, 힘들더군요. 평생 로맨틱 코미디 연출을 하고 사는 게 꿈이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 PD가 아닌 거예요. 괴롭고 분해서 새벽 4시가 되면 눈이 번쩍 떠지는 거예요. 잠이 안 와요.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 매일 블로그에 글을 썼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했지요? 제게는 블로그가 그랬어요. 수백만 명의 시청자가 보는 드라마를 연출할 수 없으니 불행할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블로그에 매일 찾아오는 100명의 방문자도 소중하고 고맙더라고요. 댓글 하나 달리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어느 순간, 저는 글 쓰는 즐거움을 아는 몸이 되었고요. 지금도 매일 아침 블로그에 한편씩 글을 올립니다. 그 블로그에 올린 글을 모아 낸 책이 자기계발서 분야 1위 베스트셀러,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고요.
직장인의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강도 높은 자극을 추구하기보다, 작은 성취를 조금씩 자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아야 해요. 늘 하는 업무나 특기는 그 성취의 기준이 높습니다. 새로 시작한 일은 기준이 바닥에서 시작합니다. 조금만 늘어도 성취의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춤이든, 영어 공부든, 블로그 글쓰기든, 이제껏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해보세요. 그 속에서 조그만 기쁨을 자주 맛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잊지 마세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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