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글씨를 참 못 씁니다. 오죽하면 어릴 적 친구들이 '토룡체의 창시자, 김민식 선생'이라고 놀렸겠어요. 종이 위에 지렁이가 구불구불 기어갑니다. 중학생 때는 서예학원의 펜글씨반도 다녔지만 소용없더군요. 악필도 불치병인가봐요.
필체는 저의 진로도 막았어요. 아버지는 "글쓰는 직업을 하고 싶다고? 니 글씨로 문과에 가면 굶어죽기 딱 좋다. 너만 알아보는 글씨로 어떻게 일 할래?"하시며 문과로 가고 싶다는 저의 소망을 꺾었습니다. 컴퓨터가 제대로 쓰이기 전의 일이었지요. "글씨가 엉망이어도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딱 하나 있다. 그게 의사야."
고교 시절, 정말 우울했어요. 이과생의 몸 안에 갇힌 문과생... 성적은 나날이 떨어지는데 답이 보이지 않았어요. 의대 갈 성적이 안 되니, 공대를 가야하는데, 그것도 적성에는 안 맞고. 수업 시간에 멍하니 딴 생각만 하면서 보냈어요.
작년 말, 새 책을 준비중이라는 얘기에 회사 후배 PD가 그랬어요.
"형, 이번에 책 내면 그 저자 싸인은 좀 바꿔요."
"내 싸인이 어때서?"
"형 싸인, 너무 유치하고 구려요. 좀 더 품위있는 걸로 바꿔요."
후배가 유치하다고 타박하는 싸인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고교 시절, 우울한 날이면 몽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저는 평생 책만 읽으며 살고 싶었어요. 그러다 언젠가 책을 내는 게 꿈이었어요. '가만, 책을 쓴다면, 저자 친필 싸인이 필요할 것 아닌가?' 그래서 수업 시간에 끙끙거리면서 싸인을 만들었어요. 여러개를 만들고 지우고 만들고 지우고 그러다... 문득 제 이름을 보니, 위아래 자음에 모음은 세 글자가 똑같더군요.
세 번 반복 되는 모음은 하나 생략하고, 자음을 늘어놔봤어요. ㅁ이 두개... 두개의 미음을 나란히 붙여보니, 안경을 쓴 제 눈 같았어요.
ㄱ으로 앞머리를 휘날리고, ㅅ과 ㄱ을 날려서 코와 입처럼 그려봤어요. 만화 주인공은 눈으로 감정을 표현합니다. 슬프거나 웃거나 눈으로 표현합니다. '내 비록 지금은 울고 있지만, 언젠가는 웃으며 살리라.' 그런 소망을 담아 웃는 눈을 그려넣었어요.
왕따로 살던 제가 고교 시절에 만든 유치한 싸인입니다. 나이 50이 된 지금의 저와는 어울리지 않지요. 그럼에도 이 싸인을 버릴 수가 없네요.
매일 책을 읽습니다. 한 권을 못 읽을 때도 있고, 한 권을 더 읽을 때도 있어요. 중요한 건 이게 어린 시절의 저의 꿈이었다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책만 읽어도 좋겠다... 그리고 매일 아침 5시가 되면 블로그에 글을 씁니다.
어른의 삶은, 어린 시절 나를 위한 선물이에요. 힘든 시절의 내가 꿈꾼 삶, 그 꿈을 이뤄주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인터파크'에서 저자 친필 싸인본 행사를 하고 싶다고. 싸인을 해줄 수 있냐고요. 약간 망설였어요. 워낙 악필이라 기껏 하고도 '무슨 작가 싸인이 이렇게 성의가 없고 유치해? 집에 있는 초딩 딸이 대신 한 거 아냐?'할까봐서요... 제가 집에서 몇날 며칠이고 끙끙거리고 앉아 싸인을 하는 걸 보고 민서가 대신 해주겠다고 나선 적도 몇 번 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민서야, 이건 아빠가 어린 시절부터 꾸었던 꿈이야. 절대 양보할 수 없어."
5일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싸인만 했습니다. 만년필 리필 잉크만 여섯개를 썼고요... 책마다 들어간 메시지는 조금씩 다릅니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를 쓰기도 하고, 독자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질문을 띄우기도 했어요. 어떤 글귀를 썼는지는 싸인본을 받으실 분을 위해 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아래의 링크에 가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저자 친필본을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 <어린 왕자 - 영문판>과 <그레이트 스피치>도 함께 선물하는군요. (각 포인트 300원)
우울한 공대생이 영어 공부로 인생을 바꾼 이야기가 책 한 권으로 나왔고요. 우울한 시절의 몽상이 남긴 싸인이 책 속에 담겨있습니다. 제 꿈을 이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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