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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세계여행

짠돌이 세계여행 1. 서문

by 김민식pd 2011. 9. 5.

1987년, 대학교 1학년때, 고향 울산에서 길을 가다, 한 서양인 할머니를 만났다. 당시 울산 시내에서 외국인을 만난다는 건 참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일흔 넘은 꼬부랑 할머니가 혼자서 지도 한장 들고 다니는 모습이란!  

영국에서 온 그 할머니는 일흔 평생 동안 전세계 25개국을 여행다닌 여행 매니아였다. 그 할머니의 용감함이 너무 부러웠다. 당시 난 경상도 촌놈으로 제주도 한 번 못가봤는데! 어설픈 영어로 한마디 했다. 'I envy you.'


그때 그 할머니의 답.
'No, I envy you. 나는 이미 일흔이 넘어 여행의 막바지이지만, 넌 이제 스물이잖아. 앞으로 네가 살 날이 훨씬 더 많고, 넌 나보다 더 많은 나라를 다니게 될 거야.'

하지만 난 그때 가난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그리고 1987년 당시엔 해외여행이 금지된 시절이기도 했고... 계면쩍게 웃으며, 'For me, it's impossible.'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상한 할머니,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내게 말했다.
'You are young. Anything is possible. Just go. You don't need much money.
Why do you think I am the only English lady here in Korea?
Back in England, my friends have money. But they don't know what to do with their money.
You only need to make up your mind. Everything else will follow.'
'But... I am afraid...'
'Boy, you need to know only one thing. People live there.'

'거기도 사람이 산다.' 이 말은 내가 훗날 20년간 배낭여행 다니며 난관에 처할때마다 되새기는 문구다. 인도건 태국이건 어디건 난 여행 가면서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다. 가서 현지에서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왜?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그 할머니를 만난 5년 후, 1992년 나는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갔다. 그 할머니가 사는 나라 영국으로...
비록 할머니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두달간의 유럽 여행은 참으로 즐거웠다.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 계기였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 자신과 약속했다. '앞으로 일 년에 한번씩 꼭 해외로 여행을 떠나자.'

다들 배낭여행의 시작은 유럽 여행이고, 마지막은 인도여행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1년 봄, 나는 배낭여행 20주년 기념으로 인도 네팔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인생을 살며 가장 뿌듯한 점은, 지난 20년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욕 먹을 지도 모른다. 매년 한 차례씩 해외 여행을 다녔다면 복 받은 삶이네! 이거 자랑질아냐? 이어질 여행기를 보면 알겠지만, 절대 윤택한 여행은 아니다. 그냥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여행에 조건은 필요없다.

대학생들에게 '배낭 여행 안 가요?'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돈 많이 벌면 그때 가야죠. 안정된 직장 잡으면 그때 가야죠.' 이런 결심, 의미없다. '내가 돈 많이 벌면 우리 사귀자. 안정된 직장을 잡으면 우리 결혼하자.' 이런 사람, 나는 별로다. 근성이 없지 않은가? 돈 없으면 어때, 둘이 마음만 맞으면 되지! 직장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널 사랑하는데! 이렇게 큰소리 쳐야 하는 거 아닌가? 돈 벌면 사귀자는 건, 그러다 돈 떨어지면 헤어지자는 소린가? 직장 잡고 결혼했다가 회사 잘리면 이혼이라도 해야 하나? 

연애건 여행이건 조건 따지지 마라. 지금 조건이 안되서 못간다고 하는 사람은 평생 못 간다. 한번 조건을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겠다고 결심해라. 당신이 지금 살면서 매달리는 일상의 모든 것,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게 배낭여행이다. 달랑 배낭 하나 매고 낯선 나라에서 혼자 한 달을 살아내는 것, 바로 무소유의 실천이 배낭 여행의 미덕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영국 할머니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그 할머니가 해준 그 한마디. '넌 앞으로 나보다 더 많은 나라를 보게 될 거야.' 이 말이 내 가슴에 불을 당긴 거다. 세계일주? 별 거 아니다. 그냥 지금 갈 수 있는 나라부터 시작하면 된다.

20년간의 짠돌이 세계일주, 지금부터 시작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웬 염장질이냐?' 라고 돌 던진다면, 기꺼이 맞아드리겠다. 내 여행일지를 보고, '아, 여행에 큰 돈 필요한거 아니구나. 그냥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떠날 수 있구나!'하고 깨닫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긴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25년전 70세 영국 할머니에게 받은 지혜,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을 뿐이다. 

뒤에 오는 이를 위해, 손 들어 길을 일러 주는 것,
그것이 먼저 길 떠난 여행자의 도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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