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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

by 김민식pd 2016. 2. 9.

(지난 가을 아버지를 모시고 떠난 미국 여행, 그 첫날 쓴 일기. 이제야 올리네요~^^)

 

첫날부터 망했구나!

망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유나이티드 항공사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가 2시간 늦게 출발한다고 전광판에 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한다. 공항 대기 시간이 2시간인데, 인천에서 2시간 늦게 출발하면? 카운터의 직원 표정이 어두워진다. 물어보니 뉴욕에 저녁 9시 50분 도착 예정이던 원래 연결편을 탈 수가 없단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6시간 대기했다가 다음날 새벽  4시 50분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야 한단다. 이틀 연속 비행기에서 자야한다고?!

출장도 아니라 여행 가는 것이니 좀 늦으면 어떠냐고 싶겠지만, 나는 이번 여행에 75세 된 아버지를 모시고 간다. 가뜩이나 뉴욕까지 가는 비행시간만 24시간이라 그걸 어떻게 버티실까 걱정인데, 심지어 공항 대기 6시간에 다음날 새벽 도착이라니! 망해도 완전 망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국적기로 뉴욕 직항 사는 건데, 괜히 싼 티켓 끊었다가 망했네..... 저녁에 뉴욕에 도착하면 편히 쉬시라고 JFK 공항 근처 호텔까지 잡아놨는데, 숙박비도 그냥 날렸다. 아, 젠장.....

죄지은 표정으로 탑승 수속을 하던 여직원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혹시 미국 비자 신청은 하셨나요?"

"미국은 이제 비자 면제 국가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911 이후로 입국 심사가 까다로와져서 ESTA라고 하는 전자 비자를 신청하셔야 하는데요."

엥? 갑자기 저자세 급전환...

"안 했는데, 어쩌죠?"

"다행히 비행기가 2시간 늦게 뜨는 바람에 아직 시간 여유가 있네요. (!) 2층 인터넷 카페로 가서 거기서 신청해보세요." 

부랴부랴 인천공항 2층 카페 베네 옆 무료 인터넷 카페에 가서 전자 비자 신청을 했다. 만약 비행기가 제 시간에 떴면 우리는 비자가 없어 비행기를 아예 못 탈 뻔 했다. 아버지 모시고 뉴욕 간다고 큰 소리치고 집에서 나왔는데, 다시 짐끌고 들어가면서, 응, 내가 비행기를 못 탔어. ESTA 신청을 안 해서... 할 뻔 했다...  비행기 지연 출발이 알고보니 천우신조!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화를 잘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살아보니, 인생에서 좋은 일이라고 마냥 좋은 것도 없고, 나쁜 일이라고 아주 나쁜 일도 없더라. 어떤 일이 일어날 때는, 다 일어날만 하니까 일어난 거고, 일단 일어난 일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반응은,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네?' 하고 웃어 넘기는 거다. 그래야 정신 건강에 좋다. 가뜩이나 일이 안 풀리는데 소리지르고 화까지 내면 촬영장 분위기만 더 나빠진다.

물론 나도 처음 'DELAYED'라는 전광판 글씨를 보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뉴욕 연결편을 못 탄다고 하는 순간, 화가 치밀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때 만약 애꿎은 직원에게 소리지르고 진상짓을 했더라면, 무척 민망할 뻔 했다. ^^ 비행기 연착 덕에 뒤늦게 비자 수속을 마쳤으니까...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버지는?


아주 잘 지내시더라. 공항에서 6시간 대기하는 동안, 그 넓은 공항에서 트레킹을 하시더라. 국내선 라운지에서 국제선 로비까지 왔다 갔다 하며 식당 메뉴 비교도 하고, 특산물 기념품 가게 아이쇼핑도 하시고. 난 바뀐 항공권 보딩패스 받느라 안절부절 못하고, 스마트폰 충전 시키느라 코드 꽂아두고 자리만 지켰는데 말이다.


"대기 시간이 길어서 짜증나지 않으세요?" 하고 여쭤보니, 아버지 말씀.  

"노인정가서 매일 바둑만 두느라 지겨웠는데, 미국 공항에 오니까 온 세상 사람 구경 다하고 좋네. 공짜 구경으로는 역시 사람 구경만한 게 없어."

아, 역시 여행의 고수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아버지에게 오늘도 한 수 배운다.

 

재작년 추석에 떠난 보라카이 여행에서, 아버지와 함께.

올 가을엔 아버지랑 어디로 떠나볼까?

그 궁리로 또 한 해를 버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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