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 나의 지상과제는 연애였다. 어떻게 하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악기를 배우면 좀 멋있어 보이려나? 기타를 배웠다. 동아리방에 앉아서 혼자 분위기를 잡으며 기타를 퉁겼다.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의 도입부를 기타를 퉁기다가 "There was a lady~ who was sure" 하고 노래를 시작하면 후배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형, 거기까지만~~~!!!"
기타는 짝짓기에 별 도움이 안 되는구나. 다른 악기로 가볼까? 목관악기의 음색을 좋아해서 플룻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플룻이 꽤 비싸더라. 수십만원 하는 악기 값을 마련할 길이 없었고, 또 수십만원하는 레슨비도 감당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팬플룻을 배웠다. 90년대에는 팬플룻을 사면 악기사에서 강습을 무료로 해주었다. '외로운 양치기'를 불며 짝을 찾는 소리를 냈는데, 어머니가 기겁을 하시더라. "가뜩이나 입술이 두꺼워서 흑인이라고 놀림받는데 그걸 불면 입술이 더 나오지 않겠니." 눈물을 머금고 그만 뒀다.
재작년엔가,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방과후 수업으로 플룻을 배웠다. 큰 아이가 플룻을 하고 싶다고 하니, 아내가 그 비싼 플룻을 선뜻 주더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갖게 된 딸을 보고, 좋은 아빠 만나 호강하는 건 좋은데, 과연 내가 딸을 잘 키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 내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은 돈을 아껴쓰는 짠돌이 습성이다. 이건 어린 시절 가난이 안겨준 선물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이에겐 부족함없이 살게 해주고 있다. 이게 과연 잘 하는 일일까?
초등학교 때는 플룻을 곧잘 불던 아이가 중학교에 올라간 후, 바빠져서 플룻은 혼자 구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더라. 저 비싼 악기를! 그래서 딸의 플룻으로 레슨을 받고 연주를 시작했다. 플룻이 그렇게 좋으면, 내 걸 따로 사라고 아내는 닥달하지만, 돈을 주고 새로 사야한다면, 그냥 안하고 만다. 기왕에 사둔 거니까, 놀리기 아까워서 하는 거다. 난 그런 인간이다.
레슨비를 아끼기 위해 온라인 강습 사이트도 찾아봤다. 있다! 인터넷이 나온 후로, 옛날보다 뭐든지 다 싸다. 영어 공부도 인터넷 덕분에 예전보다 확실히 싸고 편해졌다.
뮤직 필드, 온라인 악기 강습 사이트인데, 프로그램이 상당히 좋다. 레슨비도 저렴하고. 학원까지 갈 필요없이, 언제든 내가 여유로운 시간에 악기 연습을 할 수 있어 좋다.
기본 주법을 마스터한 요즘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취미를 즐긴다. 악보집을 몇 권 사서, (책 사는 돈은 안 아깝다.) 그 중 연주하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유튜브에서 연주 영상을 찾아본다. 듣고, 따라 하고, 듣고 따라하고.
악기를 배우는 거나 외국어 공부나 똑같다. 레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충분한 연습이다.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 즐거워야 자꾸하고, 자꾸해야 오래하고, 오래해야 잘 하게 된다. 잘하면 더 즐겁다. 이 순환을 몸으로 익히는게 공부다. 악기든 외국어든. 요즘 아이들은 학원 다니는 바쁜 일과 속에서 끼워넣기로 악기를 배운다. 악기에 소질이 있으면 혹시 이걸로 대학 갈 수 있을까 하고. 아이들이 하는 모든 일의 척도가 대학 진학이다. 그러면 악기 연주가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으니까 하고 싶지 않고, 하기 싫은 아이를 레슨을 시키려니까 돈이 들고, 돈이 드니까 오래 가는 취미가 되기 힘들다.
지휘자 구자범 선생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음대 입시 전형에 면접관으로 간 선생이,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아이들을 보고, 클래식 말고, 본인이 좋아하는 곡을 한번 연주해보라고 주문했더니 아이들이 다들 얼빠진 표정을 짓더란다. 팝송도 좋고, 가요도 좋고, 민요도 좋으니, 뭐든 본인이 좋아하는 곡을 한번 해보라는 얘기에 아이들이 당황한거지. 입시를 위해 어려서부터 어려운 노래를 틀리지 않고 부는 것만 연습했지, 좋아하는 노래를 즐겁게 부는 법은 모르는 거다. 연주회에 나가고, 콩쿨 경연에 나가고, 매번 틀리면 안된다는 긴장 속에서 살다보니 아이들에게는 음악이 즐겁지 않다. 틀리지 않는 것보다 즐기는 게 더 중요한데 말이다.
나이 들어 혼자 취미로 플룻을 배우니 참 좋다. 평생 들은 음악 중 좋았던 것은 다 시도해본다. 비틀즈의 오블라디 오블라다, 오펜바흐의 캉캉, 놀이공원에서 자주 들은 It's a small world 모두 다 나의 단골 레파토리다. 새로운 취미를 익히는 게 참 즐겁다. 일은 괴롭지만, 취미는 재미있다. 사람들은 일과 가정의 조화를 강조하지만, 나는 일과 취미의 조화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을 위해 쓰는 시간과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지.
얼마전 둘째랑 놀다가 아이 책상을 보니, 서랍 한 구석에 리코더가 굴러다니더라. 음, 다음엔 리코더를 배워볼까나? 세상에 공짜로 즐길 수 있는 게 참 많다. ^^
나는 오늘도 독주회에 간다.
연주자는 김민식, 악기는 딸이 쓰던 플룻, 선생님은 유튜브다.
언젠가는 실버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플루티스트가 되는 게 꿈이다.
공짜로 즐기는 세상, 누려줄 것이야!
'공짜로 즐기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짠돌이 화장실에 가다 (3) | 2016.02.01 |
---|---|
짠돌이의 탄생 (2) | 2016.01.27 |
차라리 유승준을 용서하라 (13) | 2016.01.16 |
짠돌이 골방에 가다 (4) | 2016.01.12 |
짠돌이 도서관에 가다 (13) | 2016.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