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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어느 엠병신의 눈물

by 김민식pd 2014. 5. 28.

어제 새벽 4시, 피고인석에 앉아 국민배심원단과 판사님들께서 내린 판결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곳 블로그에 연재했던 2012 MBC 파업 일지에 대한 하나의 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요.

170일간 1000명의 조합원이 함께 했던 MBC 노동조합의 파업, 정당했다는 판결.

검찰이 기소한 업무방해건에 대해 법원은 무죄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월요일 오전 9시 반부터 17시간 동안 이어진 긴 재판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어요. 모 본부장님께서 증언을 하실 때는 급탕 지옥이었구요, 그러다 신인수 변호사님께서 변론을 펼치면 극락 천당이었어요. 다시 검찰이 제게 징역 2년형을 구형했을 때는 멘붕 지옥이었어요. 그러다 판결을 들고 동료들과 부둥켜 안을 때는 정말... 아, 진짜 드라마틱한 하루였습니다. 

 

물론 웃기는 순간도 있었어요. MBC 10층 사장실 앞 복도 CCTV에 찍힌 사진을 프로젝터에 띄워놓고 검사가 증인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이곳, 경영진 사무실 앞 복도에서 조합원들을 선동하고 있는 이 사람, 여기 앉아있는 김민식 피고 맞지요?"

"아닙니다. 저 분은 다른 사람입니다."

네, 사진의 인물은 전흥배 촬영감독이라고 저와 주말 연속극 '글로리아'를 만든 사람이구요. 키 180이 넘는 거구에 체격도 저보다 훨씬 좋고 각진 턱에 사내다운 외모가 인상적인 친구랍니다. 저하고는 완전 딴판이지요. (턱선이 워낙 강해보여, 거기에 찍히면 죽을 것 같아요.)   

 

순간 검찰이 측은하기 까지 하더군요. 

'누군가 과격한 포즈를 취하면 그게 다 김민식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만큼 간절한가 보다. 나를 집어넣고 싶어서.'

사람은 간절할 때 실수를 저지릅니다. 검사의 간절한 마음이 안면 인식 장애를 불러일으켰듯, MBC가 세월호 참사 초반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낸 것은 정부를 향한 보도국 간부들의 간절함이 너무 컸던 탓입니다. 그런데요, 검찰도 언론도, 그렇게 높은 사람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설설 기는 사람 아니거든요. 오히려 아래에 있는 국민과 시청자를 보고 뛰어야 할 분들이거든요? (드라마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감독 눈치 보느라 설설 기는 곳도 있구요, 각자 맡은 일을 감독 눈치 안보고 알아서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감독이 만듭니다. 지금 검찰과 언론이 빚어낸 이 지옥같은 현실, 누구 탓일까요?)

 

회사에서 채증해서 제공한 동영상에는 파업 기간 동안 저의 행각이 낱낱이 기록되어있더군요. 10층 복도에서 '해고귀신 물러가라'며 왕소금을 뿌리고, 보도국 사무실 앞 복도에서는 왜곡 귀신 물러가라며 굿을 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로맨틱 코미디 전문 연출가인데, 그냥 철부지 딴따라에 날라리 피디인데, 어쩌다 내가 검찰에게 기소당해 징역 2년형을 구형받는 신세가 되었을까? 

 

저는요, MBC 노조 편성제작 부위원장으로서 파업 때 집회 프로그램 연출을 담당했습니다. 보통 방송사 노조가 집회를 하면 아나운서 조합원이 사회를 봅니다. 하지만 당시 집행부는 제게 사회를 맡겼습니다. 미남 아나운서 대신 추남 피디? 그 말도 안되는 캐스팅에 저도 동의했습니다. 파업이 끝나고 방송이 정상화되면 아나운서는 다시 화면으로 시청자를 만나야하는데, 그들에게 파업 행사 진행이라는 이미지를 씌우기는 싫었습니다. 앵커도, 아나운서도 다 MBC의 소중한 브랜드이자 자산입니다. 우리가 보호해야지요.

 

그렇게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는데, 늘 힘들었어요. '파워업 피떡 수첩'을 보고,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보면서 그동안 피디 수첩 피디들과 기자들이 겪은 일들을 하나 하나 들여다보는게 너무나 괴로웠어요. 나는 그동안 로맨틱 코미디를 연출하며 정말 즐겁게 살았는데, 내 동료들은 취재현장에서 쫓겨나고, 일터에서 박해당하고, 몇년을 함께 일한 라디오 MC를 떠나보내고, 그렇게 살았더라구요. 밝고 명랑하게 살아온 내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전 어제 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고, 조합원들의 축하 인사를 받기 위해 MBC 남문 앞에 섰을 때, 또 부끄러워졌습니다. 점심 먹으러 가던 동료들이 발길을 멈추고 저희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데, 그 표정이 한없이 밝은거에요. 좋아하던 선배들은 다 해고되고, 취재 나가면 '엠병신 기레기' 소리나 듣고, 정말 즐거운 일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간만에 들려온 기쁜 소식에 다들 모여서 웃고 있더라구요.

 

그들의 웃는 얼굴을 보자, 또 부끄러워졌습니다. 지금 MBC에서 어쩌면 쫓겨난 해직기자보다 더 힘든 하루하루를 사는 게 그들인데, 우리가 저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주책맞게 눈물도 나더군요. 에효... 그 전날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감정의 소모가 너무 컸나봐요...

어제 저녁에 둘째딸이랑 놀고 있는데, 누가 유튜브 링크를 보내줬어요.

'내조의 여왕 김민식 PD 눈물'이라는 동영상... 

8살 민서가 옆에서 막 놀렸어요.

"아빠, 울고 있네? 정말 부끄럽겠다. 그치?"

네, 정말 부끄러워요.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엠병신 피디입니다.'란 글을 올린 후배가 대기발령을 받았습니다. 원래 교양 피디 지망이었는데, MBC가 시사교양국 신입 사원을 몇년째 뽑지 않자 예능국으로 입사한 친구입니다. 그 친구에게는 교양 피디가 되는 것보다 MBC 피디가 되는게 더 중요했던 거죠. 그만큼 회사를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밖에 나가 엠병신 기레기라고 욕먹는 기자를 보다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올린 거죠. 아마 저처럼 그냥 명랑하게 예능을 만들고 있기엔 힘들었나봐요. 그런 후배가 어제 대기발령을 받았는데, 못난 선배는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그냥 우는 것 말고는. 정말 병신같아요, 내가...

 

 

(출처: MBC 오동운 피디 페이스북)

 

법정 앞에 앉아 웃으며 검찰의 구형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MBC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고, 나라에 대한 걱정이 지나친 게 저의 죄입니다.

그래서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달게 받아야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 MBC 뉴스를 보며, 죽을 것처럼 괴로운 날이 많았어요.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나의 괴로움은 나의 회사 사랑이 너무 지극한 데서 오는구나. 회사를,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은 그들인데, 왜 내가 괴로운 인생이라는 벌을 받아야하나?'

 

네, 어제는 병신처럼 울었지만, 앞으론 다시 웃으며 살 겁니다.

울면 주저 앉게 되구요. 웃으면 다시 뛸 수도 있어요.

내 삶을 사랑하는 마음,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그 긍정에서 변화는 시작될 테니까요.

 

어제 판결을 듣고, 기뻐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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