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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잘 치는 축구 선수

by 김민식pd 2013. 12. 2.

외대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MBC 예능국에 입사했을 때, 선배들은 나를 스태프들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동시 통역사 출신 피디입니다. 피디들 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친구죠.”

나는 당시 그런 소개가 싫었다. 마치 새로 온 축구 국가 대표입니다.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 중에서 탁구를 제일 잘 치죠.’ 이런 격이 아닌가. PD라면 연출을 잘 해야지, 영어를 잘 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통역사들 중에서 제일 잘 웃긴다는 얘기에 코미디 피디로 전직했는데, 와서 보니 피디들 중에서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평가나 듣고 있다. 그래서 나의 오랜 꿈은 영어보다 연출로 인정받는 피디가 되는 것이다.

 

통역사로 일할 때, 외국계 기업 임원 수행 통역을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방한 기간 내내 외국 임원들은 낮에는 업체 방문하고 회의하고, 밤에는 현지 직원들을 만나 그간의 노고를 위문하는 자리를 갖기에 밤낮없이 바쁘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나는 올해 초 윤창중 대변인의 방미 스캔들이 터졌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쁘기로 치자면 당선 후 대통령의 첫 방미 일정만한 게 없다. 낮에는 수많은 미국 정치인들을 만나 일일이 새롭게 관계를 정립하고 협조를 구해야 하며, 저녁에는 대선 기간 지지해준 현지 교민들을 만나 감사의 인사를 나눠야 한다. 특히 교민들의 경우, 낮에는 생업으로 바쁘니 저녁 시간에 열리는 교민 위로의 밤행사가 고된 이민 생활 중 가장 큰 낙이고 한국인으로 사는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다. 이렇게 저녁에도 대통령께서는 바쁘셨을 텐데 어떻게 그 와중에 청와대 대변인이 연일 밤 인턴과 술을 마시고 새벽까지 노팬티 차림으로 호텔에서 활극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윤창중 대변인의 부적절한 술자리가 57일 저녁의 일이고, 바로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은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대통령이 무려 34분 동안이나 유창한 영어로연설하며 숱한 기립 박수를 받은 그 순간, 윤창중은 비밀리에 비행기를 타고 급히 귀국했고 다음날 바로 전격 경질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상상력이 딸리는 피디로서 굳이 시나리오를 써보자면 이런 게 아닐까? 대통령께서는 아마 미의회에서의 장문의 영어 연설을 앞두고 매일 밤 특별 과외를 받으셨을 게다. 미국 현지에서 발음 교정 받고 영어 원고 암기 연습하시느라 바쁘셨을 게다. 그 바람에 공식 일정이 없어 무료했던 윤창중 대변인께서는 머나먼 타지에서의 외롭고 긴 밤을 견디지 못해 사단이 난 게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 때마다 보여주시는 화려한 외국어 실력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중국 칭화 대학에 가서는 중국어로 연설하고, 프랑스 경제인 간담회에 가서는 불어로 연설하고, 영국에 가서는 꽃마차를 타고 여왕과 영어로 환담을 나눈다. , 정말 자랑스러운 대통령의 모습이시다.

 

그렇다면 요즘 한국의 외교 상황은 어떨까? 북한 핵문제는 전혀 해결의 기미가 없고, 한일 관계는 지난 1년 동안 악화일로를 걷고 있으며, 중국은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CADIZ) 선포하여 한반도 주변 정세를 긴장시키고 있다. 여기에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 참여에 대해 '관심 표명'을 함으로써 국내에서는 대통령의 외교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까지 터져 나오고 있다.

 

전공 팽개치고 영어만 잘 하는 건 별 의미 없다. 요즘 영어 잘 하는 사람 정말 많다. 그 많은 통역사들도 먹고 살아야하니 대통령께서는 이제 국제무대에 나가 외국어는 통역사들에게 맡기고 본연의 업무에 매진해주시길 바란다. 그동안 보여준 현란한 탁구 실력에 박수를 보내는 건 여기까지다. 월드컵 축구 경기에 나가서 스매싱만 하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피디 저널 연재 칼럼 '김민식 피디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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