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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최악의 방송 사고

by 김민식pd 2013. 12. 23.

예전에 어느 라디오 MC는 애드리브를 좋아해서 작가가 써준 대본을 마다하고 직접 오프닝 멘트를 준비하곤 했단다. 달력을 찾아 흔히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경찰의 날’ ‘법의 날’ ‘무역의 날’, 이런 기념일을 프로그램 앞머리에 써먹었단다.

“1021, 오늘은 경찰의 날입니다. 전국의 경찰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프닝에서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MC가 던진 인사말.

“420, 오늘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전국의 장애인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부조에서 지켜보던 작가와 피디, 얼마나 기겁했을까?

 

피디 입장에서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방송 사고다. 오래전 음악 프로그램 조연출 시절, 야외 공설 운동장에서 공개방송을 하는데 관중석에서 일어난 취객 하나가 무대 위 초미니를 입은 여가수에게 다가갔다. 당시 나는 미식축구 선수처럼 돌진해서 취객을 덮친 후, 부둥켜안고 카메라 앵글 밖으로 굴렀는데, 나 스스로 놀랐다. 내 속에 그런 박력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몇 해 전 가요 프로그램에서 누군가 바지를 벗어 중요한 부위를 노출시켰을 때, 안타까움이 일었다. ‘조연출 입장에선 뛰어들어 덮치기도 힘들겠군.’

 

내 귀에 도청장치가 달려있다!” 사건 이후 외부인 난입은 방송사고 중 단골 메뉴다. 외부인 탓에 방송이 중단된 최근 사례로는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의 진짜 사나이난입 사태를 들 수 있다. 천안함 폭침에 대해 의문을 표했던 이외수씨가 진짜 사나이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은 하의원은 황당하고 당혹스러움을 넘어 참담한 심정이다. MBC 측에 즉각 공개사과와 함께 해당 부분에 대한 방송 중지를 요청한다.’고 논평을 냈다.

 

제작진이 결국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 이외수 씨의 출연분량을 통편집하기로 결정했는데, 국회의원이 악의적으로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훼손하고 피디의 제작 자율성을 침해했다는 비난이 번지자 하태경 의원은 급히 해명을 내놓았다. “제가 MBC 측에 외압을 가했다는데. MBC측에 직접 연락해 이외수 부분을 통편집하라는 압력성 요구를 한 적은 없습니다. 노조가 강한 MBC통편집결정을 할 것이라고 예상 못해 많이 놀랐습니다.” 라고.

 

정말로 황당하고 당혹스러움을 넘어 참담한 심정이다. “맷집이 강한 줄 알고 한 대 친 건데, 겨우 그 정도에 죽어버릴 줄 정말 몰랐다.” 이런 얘기인가? 방송 중단 결정에 많이 놀랐다는 하태경 의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노조가 강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공영방송으로 제작 자율성을 지키지 못하고 정치적 외압에 따라 함부로 방송을 죽여서 정말 미안하다.

 

피디 입장에서 방송 사고보다 무서운 것은 방송통신심의위의 징계다. 방송 사고를 내면 양복 입고 심의위원들 앞에 불려가서 혼나는데, 피디 개인에게 주어지는 굴욕보다 더 무서운 것은 회사에 매겨지는 벌점이다. 방송사는 허가 사업자다. 정부에서 내준 방송 면허로 온 직원이 먹고 사는데 중징계는 재허가 심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에 조직의 일원으로 무조건 피하고 싶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9'이 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 내용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방통심의위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 막말이나 명예훼손이 아닌 공정성 및 객관성 문제로 종합편성채널이 중징계를 받은 것은 처음이란다. 공중파 피디로서 종편 뉴스에 내려진 중징계 소식이 부()러운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2013 아나운서 대상을 받은 아나운서가 수상 이틀 전 아나운서 국에서 방출되고, 고인이 된 대통령을 조롱하는 이미지 하나로 방송이 온 국민의 조롱거리가 되고, 국회의원 말 한마디에 예능 프로그램 촬영분이 통째로 날아가는 시절, 감히 여쭙고 싶다.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작가의 입을 틀어막는 사회, 피디의 손을 묶는 사회, 어쩌다 우리 이 지경이 되었을까?

 

(피디저널 연재칼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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