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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눈 뜨고 꿈 꾸는 사람

by 김민식pd 2011. 4. 30.

PD, Why? 크리에이터의 조건을 써놓고 생각해보니, 요즘 20대의 삶은 참으로 가혹하다. 하고싶은 일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기회는 갈수록 줄어드니 말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20대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 뿐이다. 더 좋은 세상을 나눠주지 못해서.


나의 20대는 어땠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의 20대는 '뒤비쪼기'의 삶. 눈뜨고 꿈꾸는 삶이었다.


뒤비쪼기'? 고교 시절 은어였다. 영어 시간에 몰래 수학 공부하고 수학 시간에 몰래 영어 공부하기. 참으로 비효율적인 삶이다. 내 20대가 그랬다. 난 대학 시절 전공 수업 시간에 맨 뒤에 앉아 몰래 영어 소설책 읽었다. 학점이 2점대라 취업에 애는 먹었지만 다행히 영어 덕에 나중에 미국계 회사에 취업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도 다니면서 난 뒤비쪼기를 했다. 낮에는 영업뛰고 밤에는 학원가서 통역대학원 입시반 수업을 들었다. 다들 영업뛰고 나면 스트레스 받아서 밤에는 술만 펐는데, 난 영업이 즐거웠다. 힘든게 없어서 끝나면 술 대신 영어 공부했다. (맞다. 나 좀 재수없다. 그래서 친구도 없었다. 헐...) 그렇게 공부해서 회사 그만두고 외대 통역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난 뒤비쪼았다. 4학기때 다들 졸업시험 준비할 때 난 밤에 친구들 몰래 언론사 시험준비했다. 9시까지 통역 스터디하고 집에 간다고 인사하고 나와, 몰래 중앙도서관에 가 12시까지 언론사 기출문제 풀었다. 친구들에게 MBC 공채 준비한다는 얘긴 안했다. 떨어지면 쪽팔리니까. 운좋게 MBC 예능국에 입사하고도 난 뒤비쪼았다. 일밤 연출하고 느낌표 만들고 시트콤 PD를 하면서도 늘 고민했다. 이것 말고 더 재미난 건 없을까? 그러다 사내공모를 통해 드라마국으로 옮기게 된 거다.


 
난 눈뜨고 꿈꾸는 사람이다. 무언가 일을 하면서도 딴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냥 이것도 재밌지만 더 재미있는 게 없나? 궁금한거다. 영업을 그만두긴 했지만 세일즈 맨 시절, 다들 날더러 영업이 타고난 체질이라고 했다. 통역사를 그만두긴 했지만 통역대학원에선 나름 장학금도 타봤다. (성적 상위 10%에게만 준다.) 예능국을 떠났지만 시트콤 연출할 땐 정말 즐겁고 열심히 일했다.


 
눈 뜨고 꿈꾸는 사람은 위험하다. 눈 감고 꿈꾸는 사람은 현실은 외면한 채 꿈만 꾼다. 하지만 눈뜨고 꿈꾸는 사람은 멀쩡히 눈 뜨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가슴 한 구석엔 칼을 갈고 있다. 내가 여기에 만족할쏘냐. 나의 야망은 딱 하나다. 이거 말고 더 재미난 거 뭐 없을까? 


 
'이직의 달인'으로 소문이 나 가끔 찾아오는 후배들이 있다. '이직하려면 어떻게 해야되요?' 그럴때마다 이렇게 답해 준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을 죽도록 열심히 해 본 다음에 이직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건성 건성 하면, 정이 안 들고 그럼 당연히 그만두고 싶어진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이직하면 다음 직장도, 다음 직업도 만족하기 어렵다. 옮기려면 먼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한 번 해보시라. 그래도 안 맞으면 옮겨도 된다. 하지만 무엇이든 건성 건성 하고 다 해봤다고 말하는 건 곤란하다. 그건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가 어느 정도 그릇인지, 거칠게 다루어 보기 전엔 모를 일 아닌가?


 
난 아직도 눈 뜨고 꿈을 꾼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너무 재미있지만, 이보다 더 재미난 무엇은 없을까? 늙어서 죽을 때가 된다면 이런 유언 하나 남기는 게 꿈이다. "재미있게 사는 것도 이젠 질린다. 죽으면 더 재미있을까, 그게 궁금해서 이젠 가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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