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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영어 스쿨

책장 속의 편지

by 김민식pd 2013. 1. 18.

영어 단권화 작업에 대해 글을 올렸더니 사람들이 '20년전의 그 책은 어떤 책인가요?' 하고 궁금해 한다. 김영로 선생의 '영어 순해'라는 책인데 일부러 제목은 숨겼다. 1980년대 말에 내가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때는 이만한 교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많은 책들이 나와 아직도 이게 최고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니까. (나이 들면서 늘 경계하는 것이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이다.)

 

 

소설을 읽을 때, 전권 읽기라 하여 특정 작가의 작품 전체 읽기에 도전하는데 영어 공부에 있어서도 김영로 선생의 책을 좋아하여 영어순해, 영어의 핵, VOCA 22000, 영어의 핵, ACTUAL TOEFL 등, 그분의 모든 책을 통독했다. 그 중 가장 좋아해서 단권화 한 책이 바로 영어 순해다.

 

 

책장을 펼쳐보니 뒷장에 이런 저런 글귀가 눈에 띈다. 한 권을 여러번 공부했기에 새로 공부를 시작할때마다 그때 당시의 다짐을 적어두었는데, 이제와서 들춰보니 마치 퇴적암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처럼 내 인생의 여러 시기가 한 눈에 보인다.

 

 

아마 가장 먼저 쓴 글귀는 저게 아닐까싶다. '꾸준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은 무한하다.'

1987년 영어 동아리 급훈으로 지은 말인데, 대학교 1학년 때 지은 저 글이 이제와보니 마치 내 인생의 좌표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나는 저말을 믿는다. '꾸준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은 무한하다.'

 

공대에 입학했으나 신입생 시절 전공이랑 적성이 맞지않아 어떻게 살아야할까 깜깜했다. 그래서 전공 대신 영어를 선택했는데, 당시의 절박함이 책장 곳곳에 숨겨져 있다.

'좋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다.'

지금 보니 참 민망한 글귀다. 하지만 당시에 영어 공부를 하는 내 심정이 저러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평생 하기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후, 전공을 버렸다. 그래서 대신 영어 공부를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하자고 마음 먹었다.

 

89년에 방위병 입소한 후, 퇴근하고는 늘 도서관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90년 3월이면 한참 군복무 중인 시기인데 아마 그때 토플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나보다. '토플 600!'이라니, 아마 그게 당시의 목표였나보다. 지금보면 다들 가소로운 점수겠지만 당시에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목표하기엔 꽤 높은 점수였다. 쿨럭. 

 

 

토플을 맹렬하게 공부하던 대학 시절 나의 꿈은 미국 유학이었다. 그게 내 전공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영어 그 자체가 목표이어선 안되듯, 

유학 그 자체가 꿈이어서도 안된다.

요는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무엇이 될 건가 하는 것이다.'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산다. 연출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피디를 꿈꾼 적은 없다. 세상에 나만의 이야기를 나누자고 생각했지.

 

 

대학 시절 지독하게 영어를 공부한 덕에 92년 졸업할 때는 전공 학점을 포기하고도 외국계 기업에 영업사원으로 취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보면 이렇게 적혀있다.

'또다시 나타난 Dreaming Minsiki. 94년 3월의 첫 날이라네.'

꿈꾸는 민시기... ^^ 아, 지금 다시 읽으니 심하게 오글거린다. 민망해도 좀 참아주시라. 94년 3월이면 영업사원으로 한창 일하고 있던 시기다. 대학 졸업 이후 더 이상 영어 공부 할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책을 버리지는 않았다. 단권화 한 책은 그 한권만 들여다보면 영어의 체계가 다시 잡히기에 내겐 보물이다.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94년 3월의 첫 날, 무슨 생각으로 나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저 책을 잡았을까? 아마 책을 다시 본 뒤 자신감이 들었을 것이다. 다시 영어 공부에 도전해볼만 하다고... 그러니 94년 5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통역대학원 입시 준비에 들어갔겠지. 

 

아, 20년이 지난 후 다시 들여다보니 참 부끄러우면서도 실실 웃음이 나온다. 그때는 왜 저렇게 비장했을까? 인생은 그냥 하루 하루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인데...

 

오늘부터 MBC 아카데미 교육발령이다.

아카데미에서는 드라마 작가반 강의를 몇번 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처럼 배움이 부족한 사람이 뭘 가르친다고... '했는데, 어떻게 회사에서 내 마음을 뚫어봤는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남들은 돈 내고 다니는 아카데미에 나는 월급 받으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구나.

 

아카데미 나가기전 20년전 공부하던 책의 뒷장을 뒤지며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본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배울 것이다.

'꾸준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은 무한하다.'

 

추신: 김영로 선생의 책을 뒤지다 문득 그 분의 근황이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세상에 이분 불자가 되셔서 수행중이시다. 음... 결국 공부의 끝은 그곳인가? 스승의 발자취를 쫓아 나도 공부하는 학승의 자세로 인생을 살아야겠다. 그러자면 먼저 내 마음 속 분노부터 잘 다스려야 할텐데? ^^

김영로의 행복수업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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