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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대선 결과를 보고 아내가 페북에 남긴 말

by 김민식pd 2012. 12. 20.

대선 개표 상황을 보다 밤10시도 안되어 잠이 들어버렸다. 몸의 자동방어기제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마치 통증을 잊기 위해 몸이 스스로 마취 주사를 놓은 것처럼 그렇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새벽 2시에 깨어보니, 아내가 페이스북에 메시지를 남겼다. 

'남편, 실망은 해도 절망은 하지마. 짤려도 내가 먹여살릴께. Remember, life goes on.'

진심 미안해졌다. 아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이었구나. 나는 얼굴 보고 아내를 좋아한건데 말이다. ^^

   

20대에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내를 만난 일이다.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다 정직 6개월을 받았고, 당분간 드라마 피디라는 본업에는 복귀하기 힘들 상황이라 무조건 부인에게 빌붙어야한다는 일념으로 쓰는 글은 절대 아니다! ^^) 그럼 20대에 한 일 중 두번째로 잘한 것은? 영어 공부다. (영어 덕에 외대 통역대학원에서 아내를 후배로 만났다고 하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 가뜩이나 우울한데 왜 자꾸 닭살 멘트를 날리냐고 짜증내시는 분이 있다면... 이것도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다. 잘려도 먹여살려주신다니 무조건 충성하고 볼 일이다.ㅋㅋㅋ)

 

나는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외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기는 참 어렵다고들 하는데,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아무리 해도 눈에 뚜렷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나도 그랬다. 어학연수나, 유학이나, 학원 수강 없이 혼자 공부하다보니 느는 건지 어떤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성격이 미련한 덕에 그냥 밀고 나갔다. 그랬더니 어느날 갑자기 귀가 열리고 말문이 트이더라. 그때 깨달았다. 영어 공부에도 양질전환의 법칙이 통하는구나.

 

우리는 인생이 사선이라고 생각한다. 들어간 노력이 있으면 그만큼 성과가 정비례해서 올라가는 사선. 그런데 마흔 다섯이 되어 보니 인생은 계단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장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쌓이고 쌓인 노력이 임계점에 달해 순식간에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게 인생이다. 

 

영어 공부가 그렇더라. 계속 느는 게 아니라, 평평한 길을 한참 걷다가 어느 순간 계단을 오르듯 불쑥 한 단계 성장하더라. 어학 공부에서 첫 계단을 오르는 희열을 맛본 사람은 깨닫는다. 이게 사선이 아니라 계단이구나. 그럼 그 후로도 변화가 없어도 언젠가 다음 단계로 올라갈 계단이 나타나리라는 걸 확신하고 꾸준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첫 계단을 올라보지 못하면 조금 걷다 지루하면 금방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다.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앞에 계단이 있는데 말이다.

 

MBC 입사하고 조연출로 시트콤을 만들 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밤을 새워 촬영해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시트콤은 적성이 아닌 것 같으니 버라이어티 쇼로 바꿔보라고 권유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때 영어 공부에서 배운 깨달음대로 '아직 첫번째 계단이 오지 않았구나.' 하고 계속 밀고 나갔다. 그렇게 버티다 얻어걸린게 '뉴논스톱'이다.

 

 

 

 

시트콤 연출하고 드라마나 만들던 내게 인생의 최대 시련은 조기종영이었다. 그런 내가 올  해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다 별별 일을 다 겪었다. 구속영장 2번에, 대기발령에, 정직 6개월에... 이제 임기가 끝나가니 시련은 끝나려나 싶은데, 어제 대선 결과를 보니 그러지도 않을 것 같다.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우리 아들, 얼마나 크게 쓰시려고 이렇게 큰 시련을 주실꼬."

 

김재철 퇴진이라는 계단, 참 멀기도 하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꾸준히 걷는 자에게 계단은 반드시 나타난다. 오래 걸은 만큼 다리에는 힘이 붙고, 계단을 오른 후의 희열은 더 클 것이다. 언젠가 조합원들과 함께, 해직 동료들과 함께 그 계단을 오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고 오늘도 걷는다.  

 

삶은 계속된다. 질기고 독하고 당당하게,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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