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개표 상황을 보다 밤10시도 안되어 잠이 들어버렸다. 몸의 자동방어기제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마치 통증을 잊기 위해 몸이 스스로 마취 주사를 놓은 것처럼 그렇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새벽 2시에 깨어보니, 아내가 페이스북에 메시지를 남겼다. 

'남편, 실망은 해도 절망은 하지마. 짤려도 내가 먹여살릴께. Remember, life goes on.'

진심 미안해졌다. 아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이었구나. 나는 얼굴 보고 아내를 좋아한건데 말이다. ^^

   

20대에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내를 만난 일이다.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다 정직 6개월을 받았고, 당분간 드라마 피디라는 본업에는 복귀하기 힘들 상황이라 무조건 부인에게 빌붙어야한다는 일념으로 쓰는 글은 절대 아니다! ^^) 그럼 20대에 한 일 중 두번째로 잘한 것은? 영어 공부다. (영어 덕에 외대 통역대학원에서 아내를 후배로 만났다고 하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 가뜩이나 우울한데 왜 자꾸 닭살 멘트를 날리냐고 짜증내시는 분이 있다면... 이것도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다. 잘려도 먹여살려주신다니 무조건 충성하고 볼 일이다.ㅋㅋㅋ)

 

나는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외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기는 참 어렵다고들 하는데,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아무리 해도 눈에 뚜렷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나도 그랬다. 어학연수나, 유학이나, 학원 수강 없이 혼자 공부하다보니 느는 건지 어떤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성격이 미련한 덕에 그냥 밀고 나갔다. 그랬더니 어느날 갑자기 귀가 열리고 말문이 트이더라. 그때 깨달았다. 영어 공부에도 양질전환의 법칙이 통하는구나.

 

우리는 인생이 사선이라고 생각한다. 들어간 노력이 있으면 그만큼 성과가 정비례해서 올라가는 사선. 그런데 마흔 다섯이 되어 보니 인생은 계단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장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쌓이고 쌓인 노력이 임계점에 달해 순식간에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게 인생이다. 

 

영어 공부가 그렇더라. 계속 느는 게 아니라, 평평한 길을 한참 걷다가 어느 순간 계단을 오르듯 불쑥 한 단계 성장하더라. 어학 공부에서 첫 계단을 오르는 희열을 맛본 사람은 깨닫는다. 이게 사선이 아니라 계단이구나. 그럼 그 후로도 변화가 없어도 언젠가 다음 단계로 올라갈 계단이 나타나리라는 걸 확신하고 꾸준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첫 계단을 올라보지 못하면 조금 걷다 지루하면 금방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다.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앞에 계단이 있는데 말이다.

 

MBC 입사하고 조연출로 시트콤을 만들 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밤을 새워 촬영해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시트콤은 적성이 아닌 것 같으니 버라이어티 쇼로 바꿔보라고 권유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때 영어 공부에서 배운 깨달음대로 '아직 첫번째 계단이 오지 않았구나.' 하고 계속 밀고 나갔다. 그렇게 버티다 얻어걸린게 '뉴논스톱'이다.

 

 

 

 

시트콤 연출하고 드라마나 만들던 내게 인생의 최대 시련은 조기종영이었다. 그런 내가 올  해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다 별별 일을 다 겪었다. 구속영장 2번에, 대기발령에, 정직 6개월에... 이제 임기가 끝나가니 시련은 끝나려나 싶은데, 어제 대선 결과를 보니 그러지도 않을 것 같다.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우리 아들, 얼마나 크게 쓰시려고 이렇게 큰 시련을 주실꼬."

 

김재철 퇴진이라는 계단, 참 멀기도 하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꾸준히 걷는 자에게 계단은 반드시 나타난다. 오래 걸은 만큼 다리에는 힘이 붙고, 계단을 오른 후의 희열은 더 클 것이다. 언젠가 조합원들과 함께, 해직 동료들과 함께 그 계단을 오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고 오늘도 걷는다.  

 

삶은 계속된다. 질기고 독하고 당당하게,  Life goes on!

 

Posted by 김민식pd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전 댓글 더보기
  2. 우리 2012.12.20 1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이틀 내내 눈물만 납니다. 하지만 이겨내야죠..힘내요 우리 모두..!

  3. 한마디 2012.12.20 1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윗분처럼 개표상황을 보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mbc였습니다.
    컴퓨터를 켜 제일 먼저 검색어에 검색한 것도 그 이름이었죠.
    그냥..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 아직 그런 사회인 것 같단 생각이 문득 들어
    어제 너무 참담하고 아프더군요. 아직까지 많이 힘드네요.
    열심히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본 것 같은데 멀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왜이렇게 죄송할까요. 기운내란 말도.. 왜 이렇게 죄송한지.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 봅시다,
    아직은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가 않아요..

  4. 희망이 2012.12.20 1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기내시라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가슴이 아프지만...

    힘내세요...!

  5. 달과6펜스 2012.12.20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인터넷시작페이지를 바꾸려구요 그냥 개인적으로 가입된 사이트로.. 포탈검색사이트가 보기싫네요
    어떤 댓글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일제강점기시대와 독재시대에 저항했던 분들도 얼마나 힘들고 절망했을지.. 그분들 보다 지금 우리의 절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견딜 수 있다고...

  6. 2012.12.20 1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Tiret 2012.12.20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하루 종일 득표와 개표를 지켜봤습니다. 숫자라는 현실 앞에서 그 어떤 변명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밤 12시가 넘어 서울의 개표가 거의 마무리 되자 연설이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했는데, 앞으로 5년은 그 기회가 오지 않을거라 생각하니 막막했어요. 그 암담함이 지나자 김민식PD님이 떠올랐어요.
    아침에 이 글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오늘 쓴 글에 이런 부분이 있어요.
    " 그래도 아직은 나처럼 희망을 품고 있는 이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껏 울고, 한껏 슬퍼하고, 한껏 쓰러져 있어도 괜찮다고.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그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고."
    저는 아직 일어서지 못했고, 앞으로 2년 동안 정치와 사회를 입에 담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는데, 김민식PD님은 이런 저에게 웃음을 선사해주시는군요. 역시 광대(!)의 해학과 재치에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네요.

  8. ... 2012.12.20 13: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내세요..
    아니 같이 힘냅시다..

  9. Falling 2012.12.20 14: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대선이 끝나면 곧 피디님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수 있을거란 기대에 많이 설렜는데...
    어제 결과를 접하고 무력감에 휩싸여 절망속에서 살다가 피디님의 글에서 또 다시 희망을 보았어요.
    가끔 이렇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10. 파크 2012.12.20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하십니다. 저는 이민을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아직도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않은 분들도 계시네요. 열심히 살겠습니다.

  11. julian 2012.12.20 1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 5년동안 MBC 뉴스는 Bye Bye.. 무한도전만 볼려고 합니다.

  12. 소박 2012.12.20 1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내세요.
    마음이 아프네요.ㅠㅠ

    많은 분들이 이번결과 때문에 정치를 멀리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저도 현실 앞에서 자꾸 외면하게 되던데... 이번엔 눈 크게뜨고 맞서려고요.
    이럴때일수록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감시하고 지켜봐야합니다.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지 않겠습니까.

    혹 이민을 가시겠다거나 포기하시겠다거나 하는분들. 제발 끈을 놓지 말아주시기 바래요 ㅠㅠ
    5년동안 지금껏 그래왔듯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봅시다.

  13. lykie 2012.12.20 1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의, 정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잘 되게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비록 어렵게 살아가더라도 그러한 마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시련이 있을 때 그 마음의 빛은 더욱 빛나고 성숙해 갈것입니다. 그리고 화복이라고 먼저 어려운 시대 잘 버티고 나면 좋은 일이 있겠지요. 주제넘은 말이 위로가 될 수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하루종일 마음이 먹먹하네요...

  14. 2012.12.20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5. 보헤미안 2012.12.20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되서 정말 생각외로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MBC가 더 걱정이네요..드디어 예전의 마봉춘으로 되나 했더니..
    하...그것도 또 멀어져가네요...과연 박근혜 후보는..선거전 했던 약속을 지킬까요?
    아니면 그걸 지키기는 하는데 자신의 심복을 심어 똑같은 상황을 연출할까요..
    휴우...정말..심란한 날이네요.
    그래도 사모님 정말 멋진 여성분이시네요☆
    ..이번 대선..상처도 어제 많이 받았지만..그래도..얻은게 있다면.."저렇게는 안되야겠다."
    "저분처럼 되야지..공부해야지.."이런 생각을 더 굳게 했다는거죠.

  16. ㅇㅇㅇ 2012.12.21 0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개표 결과 나오고부터 눈물이 끊이질 않습니다. 일을 해야 되는데, 지금 닥친 일도 그렇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정말 한눈 팔지 말고 살아야 할 텐데,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네요. 다른 분이 그러신 것처럼 저도 지금 상황이 현실이란 게 믿기질 않아요. 19일 낮까지만 해도 얼마나 희망적이었는지!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만 싶은 심정입니다......
    저도 이젠 포털은 보고 싶지도 않고 보지도 못하겠어요. 마치 혐오스런 사진이라도 게재된 것처럼... 차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겠어요.

  17. 2012.12.21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김민식pd 2013.01.08 1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틸다님! 고맙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이 민지 삶에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감사하지요. 좋은 기회를 열심히 잘 찾아내거든요. ^^

  18. 은수저 2012.12.21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일같지않아요.제동생 쌍용해고자거든요. 아직소송중이라 복직도 될지안될지 모르는상황..그래도 희망을가져야겠죠? 힘내세요..

  19. eternity79 2012.12.21 2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http://gospel79.tistory.com

  20. 2012.12.22 0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 피디님 홈페이지 글 보고 위로 많이 받고 가는데 오늘은 제가 위로해드릴게요.
    니체가 그랬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뿐이다 라고.
    워낙 씩씩한 피디님. 힘든 상황 긍정마인드로 잘 이겨내겠지만 그래도 아자아자! 힘내세요!

  21. JuneYong 2012.12.23 2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계단이 아직 나올 때가 아닌가 봅니다 피디님!!
    곧 계단이 나오길 희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