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넉달 동안 트레바리 독서 모임에서 <습관의 힘>을 주제로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대만 여행 중 <사조영웅전>을 읽었는데요. 두 권의 책을 오가며 읽다 문득 내 삶을 바꾼 습관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어요.
내 인생의 항룡십팔장
제 인생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절은 1989년, 방위병으로 근무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때의 저는 하고 싶은 일도, 잘하는 일도 없었거든요. 의욕이 있을 리 없지요. 통신병으로 야간 근무를 서며 전화 교환대 앞을 지켰습니다. 밤 12시가 넘으면 통화량은 0에 수렴합니다. 문제는 여기가 군대라는 점입니다. 가끔 위병소에서 전화가 걸려 오는데, 새벽 3시 무료함을 못 이겨 깜박 졸다 전화를 놓치면 다음 날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졸음을 억지로 참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다행히 방위병이었기에 퇴근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김용의 <영웅문> (요즘은 <사조영웅전>이라 부르지요)을 빌려 왔습니다. 심야 근무는 혼자였어요. 모두가 잠든 시간, 저는 전화 교환대 앞에 앉아 무협지를 읽었습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무협지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소설이 재미있으니 졸 틈이 없었고, 전화도 제때 받았기에 근무 태도가 좋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책을 읽는 습관이 생기자 퇴근 후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억지로 졸음을 참아낸 날은 하루 종일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며 즐겁게 밤을 보낸 날은 퇴근 후에도 에너지가 남았습니다. 그 힘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남보다 잘하는 것 하나쯤은 갖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사조영웅전》 속 곽정이 고수가 되는 과정을 보며 깨달은 게 있어요. 고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아요. 호흡을 배우고, 몸을 다스리고,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하수가 절세 무공을 흉내 내면 몸이 먼저 상합니다.
곽정의 스승 홍칠공이 전수한 무공이 항룡십팔장인데요. 용의 움직임을 묘사한 이름부터 장엄합니다.
항룡유회 亢龍有悔, 너무 높이 오른 용은 후회가 있다.
비룡재천 飛龍在天, 하늘을 나는 용.
견룡재전 見龍在田, 들판에 모습을 드러낸 용.
사실 주먹질은 단순한 동작입니다. 하지만 고수는 그 동작에 이름을 붙입니다. 쌍룡취수! 시승육룡! 잠룡물용! 이름을 붙이는 순간, 반복은 수련이 됩니다. 평범한 동작이 영웅의 길로 바뀌지요.
저는 영어 공부를 무공 수련처럼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초 회화 10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기억에 남을 때까지 반복했습니다. 부대까지 걸어가는 길에도 혼자 큰소리로 외웠습니다. How are you? I am fine, thank you.를 혼자서 큰소리로 중얼거리니 남이 보면 이상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미친놈이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다.’ 6개월이 지나자 영어회화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웠습니다. 야간 근무 중에는 더 이상 무협지를 펼칠 필요가 없었어요. 교환대를 바라보며 머릿속 책을 암송했어요. 한 시간 동안 소리내어 영어를 외우고 나면 뿌듯한 성취감에 잠이 달아날 지경이었지요.
소설에는 ‘화산논검’이라고 천하의 고수 다섯이 모여 무공을 겨루는 자리가 나옵니다. 그 장면을 읽으며 생각했어요. 나도 ‘천하제일 무림대회’에 나가서 전국에서 온 고수들과 실력을 겨뤄보고 싶다고. 그래서 저는 1991년 3학년에 복학하고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대회에 나갔습니다. 독학으로 영어를 배운 공대생은 나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사조영웅전>을 읽으며 주인공 곽정을 응원하고 곽정에 감정이입을 심하게 했습니다. 곽정은 의로운 사람이에요. 누군가 괴로운 지경에 처하면 도우려고 나섭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이가 자신보다 강해도 겁 없이 나섭니다. 곽정이 강해지는 비결은 거기에 있어요. 고수와 싸워야 나도 고수가 됩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들만 괴롭히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죠. 겁 없이 나간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 대회에서 2등상을 탔습니다.
상장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재능이 없어서 안 되는 사람이 아니라, 수련이 덜 되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그날 이후 제 삶의 태도는 바뀌었습니다. “나는 잘하는 게 없다” 대신 “지금은 하수일 뿐, 수련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깨달음은 영어를 넘어 삶 전체로 번졌습니다. 통역사, 피디, 작가 등 매번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저는 속으로 무림 비급을 되뇌입니다.
‘잠룡물용 潛龍勿用. 아직 때가 아니다. 더 쌓자.’
‘비룡재천 飛龍在天. 이제는 날아오를 차례다.’
항룡십팔장을 실제로 쓸 일은 없지만, 그 이름 덕분에 저는 반복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10문장 읽기를 ‘수련’이라 부르니 지루하지 않았고, 혼잣말을 ‘내공 축적’이라 부르니 외롭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인생의 구음진경은 비급이 아니라 습관이었습니다.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 그것이 제 무공이었습니다.
1989년, 전화 교환대 앞에 앉아 있던 방위병은 인생을 허비한 게 아니었어요. 그곳에서 깨달았어요. 천하제일은 남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나를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제 방식대로 수련합니다. 아침에 10문장을 읽고, 하루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밀어붙입니다. 화산 정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제가 아주 단순한 습관을 반복하고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천하제일 비무대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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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습관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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