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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나의 실패담

by 김민식pd 2025. 8. 7.

중앙일보 폴인이라는 매체에서 '나의 실패담'을 주제로 서면 인터뷰 요청이 왔어요. 오늘은 제가 답변으로 쓴 글을 공유합니다.

1. 자기 소개

김민식 (전 MBC PD, 현 작가)

2. 지금까지의 삶, 혹은 커리어에서 가장 소중한 실패를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200자 내외)

1996년 MBC PD로 입사한 저는 2000년에 청춘 시트콤 <뉴 논스톱>으로 연출 데뷔를 했습니다. 첫 작품이 대박이 나서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을 받았습니다. ‘와! 나는 연출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구나!’ 신이 나서 새로운 작품에 도전했습니다. <조선에서 왔소이다>라는 시간 여행 시트콤인데요. 시간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망해 조기종영을 당했습니다.


3. 그 일이 실패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200자)

피디가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되는 ‘3거지악’이 있습니다. ‘시청률 저조, 광고판매 부진, 제작비 초과’ 저는 이 세 가지 잘못을 동시에 저지르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어요. 12부작으로 기획한 작품인데요. 방송 4회 나가고 바로 회사에서 답이 없다고 생각해 조기 종영 결정을 내렸어요.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것도 뼈아팠지만, 내가 일을 못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도 모자라 직장 동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게 참 괴로웠습니다.

4. 실패라고 인정한 후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무엇이었나요? (2-300자)

부끄럽고 창피해서 도망갔습니다. 마침 배우자가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기에 한 달간 휴가를 내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잘 나갈 때는 회사에서 계속 일을 맡겼기에 바빠서 아이랑 놀 시간도 없었는데요. 망하니까 회사에서 안 찾더라고요. 직장에선 기획을 못하는 피디, 예산 관리 못하는 피디, 돈 못 벌어오는 피디가 되었는데, 집에 오니 다섯 살 난 딸에게 종일 같이 놀아주는 좋은 아빠가 되더군요. 회사에서 잃어버린 나의 효용을 집에서 찾았습니다.

5. 실패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그 시기를 지나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나요? (2-300자)

시간 여행 시트콤이라는 새로운 기획에 도전했다가 망했기에, 다시 저의 장기인 청춘 시트콤을 만들었어요. <레인보우 로망스>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요. 대박도 쪽박도 아닌, 그냥그냥 그런 작품이었어요. 안전한 길로 갔는데, 일하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안 해본 것을 하면 망하고, 늘 하던 것을 하면 지루하구나. 그럼 어떻게 하지?’ 그때 회사 게시판에 드라마 피디 사내 공모가 떴어요. 어차피 망할 것이라면 차라리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다 망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예능 피디에서 드라마 피디로 직군을 바꾸었습니다.



6. 그때의 실패가 지금 삶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300자 내외)

예능 피디로 일하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시청률이 망하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최악의 상황으로 망해봤잖아요? 그런데도 안 죽더라고요. 죽을 만큼 창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죽지는 않더라고요. 망하는 게 두려워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고 안전한 길로만 간다? 그렇게 살면 가슴이 뛰지 않을 것 같았어요. 한번 사는 인생, 멋지게 도전하며 살아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실패를 겪은 뒤 이전과 달라진 기준이나 마인드셋, 습관 등이 있나요?

살다 보면 가끔 가슴 뛰는 일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럴 때 두 가지 감정이 일어나지요. 두려움과 설렘. 이걸 했다가 망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과 이런 일도 해보면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설렘.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오면 저는 설렘을 응원합니다.

7.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1-200자)

Expect the worst, hope for the best.
실패했을 때 최악의 경우를 떠올려보세요. 저의 경우, 최악의 경우, 일이 안 풀리면 그냥 틀어박혀서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이를테면, 독서, 영화 감상, 여행 같은 일과지요. 회사 일이 잘 풀리면 바빠서 좋고, 안 풀리면 한가해서 좋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최악도 그리 나쁘지 않아요.
성공했을 때 최고의 경우를 떠올려봅니다. 잘만하면 나는 시트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피디가 되는 거야! 예능 프로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드라마도 잘 만드는 피디가 되는 거야! 연출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책도 잘 쓰는 피디가 되는 거야!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결과를 생생하게 상상해봅니다. 그럼 어떤 도전이든 해볼만 합니다.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요. 최상의 상황을 희망하면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 찹니다. 나는 나의 설렘을 응원하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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